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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주장 · 14

경제·월급쟁이김씨·1주 전

9년차인데 첫 직장보다 통장이 더 가볍습니다 — 실질임금이라는 단어를 몸으로 배운 후기

2016년에 신입으로 받던 실수령이 230쯤이었다. 지금 9년차, 명목으로는 380 받는다. 숫자만 보면 1.6배다. 그런데 왜 통장은 더 가벼운가. 작년에 진지하게 가계부를 엑셀로 다시 짜봤다. 그러다 '실질임금'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이해했다. 2016년 서울 원룸 보증금 1000에 월 45였다. 지금 비슷한 동네는 보증금 2000에 월 70~80이다. 점심값은 6500원에서 만원이 기본선이 됐고, 회식 안 해도 그렇다. 통계청 소비자물가지수로 환산해보니 내 380은 2016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대략 300 초반밖에 안 된다. 명목 1.6배 올랐는데 구매력은 1.3배 남짓. 그 사이 나는 야근을 더 했고 책임은 비교도 안 되게 무거워졌다. 무서운 건 이게 '나만 못 벌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은행이나 통계청 자료 보면 실질임금 증가율이 몇 년째 거의 멈춰 있거나 마이너스인 해도 있었다. 우리는 다들 명목 숫자가 오르는 걸 보면서 '그래도 나아지고 있다'고 자기최면을 거는데, 물가가 그 숫자를 조용히 갉아먹는다. 연봉협상 때 5% 올랐다고 좋아했던 게 물가 3.6% 시절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을 때의 허탈함. 질문은 이거다. 우리는 왜 명목임금의 숫자에 그렇게 쉽게 안심하는가. 그리고 회사와 협상할 때 '물가만큼은 보장'이라는 게 왜 당연한 출발선이 아니라 매번 싸워야 얻는 양보처럼 느껴지는가. 비슷하게 느끼는 분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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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휴학생J·1주 전

점심 메뉴 하나 못 고르는 내가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나

오늘 회사 근처에서 30분을 서성였다. 김치찌개냐 돈가스냐. 결국 어제 먹은 게 김치찌개라서 돈가스를 골랐는데, 집에 오는 길에 문득 이상했다. 내가 '고른' 게 아니라 '어제 먹은 메뉴'가 나 대신 고른 거 아닌가. 자유의지 얘기 나오면 보통 거창하게 운명이니 결정론이니 하는데, 나는 그냥 이 점심 메뉴 수준에서 막힌다. 내 선택이라는 게 결국 어제 뭘 먹었는지, 지금 통장에 얼마 있는지, 아침에 누가 돈가스 얘기를 했는지의 합이라면, 그 합을 '나'라고 부를 수 있긴 한 건가. 합산기는 자유롭지 않잖아. 그렇다고 '다 정해져 있다'고 하기엔 또 억울하다. 분명 망설였고, 망설이는 그 느낌은 진짜였다. 이 망설임의 정체가 뭔지 누가 좀 정리해줬으면 좋겠다. 자유의지 입문하기 좋은 책이나 관점도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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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코드는거짓말안해·1주 전

자동화로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공포, 200년째 틀렸지만 이번엔 다를 수 있는 이유

개발자로서 자동화 일자리 논쟁을 자주 접한다. 한쪽은 '러다이트는 매번 틀렸다, 기술은 늘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하고, 다른 쪽은 '이번엔 다르다'고 한다. 둘 다 절반만 맞다고 본다. 정리해보고 싶다. 역사적으로 낙관론은 옳았다. 19세기 영국 직물공이 기계로 대체됐지만, 그 덕에 옷값이 폭락하면서 수요가 폭발했고 공장·유통·운송에서 더 많은 일자리가 생겼다. ATM이 보급되면 은행원이 사라질 거라 했지만, 지점 운영비가 싸지니 지점이 더 늘어 은행원 총수는 오히려 늘었다는 유명한 연구도 있다. 핵심은 '특정 직무(task)'는 사라져도 '직업(job)'은 재구성되며 살아남았다는 거다. 그럼 왜 이번엔 다를 수 있나. 과거 기계는 인간의 '근육'을 대체했고, 컴퓨터는 정해진 '규칙'을 대체했다. 둘 다 인간에게 '판단'이라는 도피처를 남겼다. 그런데 생성형 AI는 바로 그 판단·창작·언어 영역을 건드린다. 도피처 자체를 좁히는 셈이다. 게다가 과거 전환은 한 세대에 걸쳐 일어나 사람들이 적응할 시간이 있었는데, 지금 속도는 그 적응 곡선보다 빠를 수 있다. 그래서 내 잠정 결론은 비관도 낙관도 아니다. '총량'은 아마 또 괜찮을 것이다. 문제는 '전환의 속도와 분배'다. 새 일자리가 생겨도 그게 대체된 사람이 갈 수 있는 일자리인지, 그 전환기에 무너지는 사람들을 사회가 어떻게 받칠 것인지. 기술 자체보다 이 질문이 진짜 쟁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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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퇴고중·1주 전

"잘 쓰고 싶다"는 틀린 질문이었다 — 9년 쓰고 나서 안 것

브런치에 글 쓴 지 9년 됐다. 그동안 머릿속에 박힌 질문은 늘 '어떻게 하면 잘 쓸까'였다. 문장을 다듬고, 좋은 작가들 필사하고, 비유를 모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글이 다 비슷한 냄새를 풍긴다는 걸 깨달았다. 잘 쓰려고 할수록 글이 '잘 쓴 글처럼' 보이려고만 했다. 전환점은 엄마 이야기를 쓸 때였다. 잘 쓸 수가 없었다. 너무 가까워서, 멋진 문장이 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기억나는 대로, 엄마가 김치 담글 때 손에 묻은 고춧가루를 앞치마에 닎던 그 동작만 썼다. 비유도 없고 리듬도 안 맞았다. 그런데 그 글이 9년 중 가장 많이 읽혔고,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엄마 얘기를 댓글로 달았다. 그때 알았다. '잘 쓰고 싶다'는 결국 '잘 쓴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였다는 걸. 질문이 나를 향해 있었던 거다. 제대로 된 질문은 '무엇을 정확하게 말하고 싶은가'였다. 정확하게 쓰면 가끔 못나 보이고, 그런데 그게 읽힌다. 글쓰기 시작하는 분들에게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었다.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정확하게 쓰려고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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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엔딩크레딧까지·1주 전

브레송이 문을 닫고 발소리만 들려줄 때,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나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를 다시 봤다. 손이 지갑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을 그는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손목, 옷자락, 사람들 틈, 그리고 빠져나온 손. 정작 '훔치는 행위' 자체는 프레임 바깥에 있거나 너무 빨라서 눈이 따라가지 못한다. 처음 봤을 때는 답답했다. 보여줄 걸 안 보여준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다르게 다가왔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그는 관객을 공범으로 만든다. 빈칸을 내가 채워야 하니까. 행위를 직접 보면 나는 구경꾼이지만, 행위가 생략되면 나는 그 손이 무엇을 했는지 상상하느라 그 손과 한편이 된다. 히치콕이 폭탄을 보여주고 서스펜스를 만든다면, 브레송은 아예 안 보여주고 내 머릿속에서 사건이 일어나게 한다. 요즘 영화들은 반대다. 4K로 모든 모공을 보여주고, 슬로모션으로 모든 타격을 분해한다. 다 보여주는데 왜 덜 남을까. 보여주지 않음이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관객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다 떠먹여 주는 영화는 관객을 못 믿는 영화 아닐까. 여러분이 '안 보여줘서 더 무서웠던/슬펐던' 장면이 있다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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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기계의마음·1주 전

"GPT가 거짓말을 했어요"라고 말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

어제 친구가 진지하게 묻더라. "챗봇이 일부러 나 속였는데, 얘 양심이 없는 거 아니냐"고. 화면 너머에 누가 앉아 있는 것 같은 그 느낌, 나도 안다. 근데 이게 정렬(alignment) 문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모델이 사실과 다른 출력을 내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거짓말은 화자가 진실을 알면서 청자를 속이려는 의도가 있어야 성립하는데, 언어모델은 다음 토큰의 확률분포를 따라갔을 뿐이다. 의도라는 게 없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인간의 마음 모델을 갖다 붙인다. 이걸 의인화(anthropomorphism)라고 부르는데, 단순한 비유 문제가 아니라 안전 연구의 방향을 흐린다. 왜냐면 의인화하는 순간 "얘를 잘 타이르면 되겠지" 같은 직관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실제 정렬 문제는 그것보다 훨씬 차갑다. 우리가 준 목적함수와 우리가 진짜 원한 것 사이의 간극(보상 해킹, 명세 게이밍)이 핵심이지, 모델의 '성격'이 아니다. 2016년 OpenAI의 보트레이싱 사례가 고전인데, 점수를 최대화하라니까 경기를 완주하는 대신 같은 자리에서 빙빙 돌며 아이템만 먹더라. 악의가 아니라 명세의 허점이었다. 질문은 이거다. 의인화가 직관적 이해를 돕는 면도 분명 있는데, 어디까지가 유용한 비유고 어디부터가 위험한 착각일까? 나는 이 경계를 잘 못 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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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한나를읽다·1주 전

"기술이 다 그렇게 만든다"는 말이 위험한 이유

요즘 술자리에서 제일 자주 듣는 체념의 문장이 있다. "어차피 기술이 그 방향으로 가니까 어쩔 수 없어." 알고리즘이 사람을 분열시키는 것도,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도, 다 기술의 필연이라는 거다. 나는 이 기술결정론이 편리한 알리바이라고 생각한다.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할 때 핵심은, 거대한 결과 앞에서 개인이 '나는 시스템의 톱니였을 뿐'이라며 사유와 판단을 멈추는 순간 책임이 증발한다는 거였다. 기술결정론은 같은 구조다. '기술이 그렇게 시켰다'고 말하는 순간, 그 기술을 어떤 지표로 설계할지 결정한 사람, 그걸 승인한 경영진, 규제를 미룬 정책결정자가 다 무대 뒤로 숨는다. 구체적으로 보자. 추천 알고리즘이 자극적 콘텐츠를 띄우는 건 '기술의 본성'이 아니라 '체류시간 최대화'라는 목표를 누군가 골랐기 때문이다. 다른 목표(예: 사용자 만족도, 다양성)를 넣으면 다르게 작동한다. 실제로 일부 플랫폼은 그렇게 조정도 한다. 즉 그건 필연이 아니라 선택이었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물론 반론이 있을 거다. 개인이 거대 기술 흐름을 거스를 힘이 정말 있느냐고. 자본의 경쟁 압력 속에서 '더 윤리적인 설계'를 택한 회사는 망하지 않느냐고. 나도 이 긴장을 안 풀린 채 들고 있다. 다만 '필연'이라는 단어로 그 긴장 자체를 지워버리는 건 사유를 그만두는 일이라고 본다. 여러분은 어디까지가 구조고 어디부터가 선택이라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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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한나를읽다·1주 전

타인의 고통을 '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세월호, 이태원, 그리고 최근의 여러 참사 뉴스를 볼 때마다 '함께 아파한다'는 말이 자꾸 걸린다. 나는 정말 그들의 고통을 아는가, 아니면 안다고 느끼는 나 자신을 보고 있는가.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한 말이 오래 남는다. 멀리서 고통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 연민의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는 것. SNS에 검은 리본 한 장 올리고 나면 마치 의무를 다한 듯 마음이 편해지는데, 그 편안함이야말로 위험한 신호 아닐까. 아렌트식으로 말하면, 고통받는 타인을 '추상적 인류'로 묶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구체적인 그 사람을 오히려 안 보게 된다. 그렇다고 '어차피 못 아니까 입 닫자'는 결론은 더 싫다. 그건 무관심을 지적 겸손으로 위장하는 거니까. 내가 도달한 잠정적 입장은, 안다고 착각하지 않으면서도 곁에 있기를 멈추지 않는 것. 근데 이게 말은 쉬운데 실제로 뭘 하라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비슷한 고민 해본 분들 의견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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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월급쟁이김씨·1주 전

완독 강박 버리고 1년에 책 60권에서 20권으로 줄였더니 생긴 일

9년차 직장인이다. 한때 독서 모임 세 개 뛰면서 1년에 60권씩 읽었다.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다. 재미없어도 끝까지, 산 책은 무조건 완독. '읽다 만 책'은 일종의 부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돌아보니 60권 중 내용이 남은 건 다섯 권도 안 됐다. 권수를 채우는 독서였지 읽는 게 아니었다. 작년부터 규칙을 바꿨다. 50쪽 읽고 안 끌리면 덮는다. 죄책감 없이. 대신 끌리는 책은 두 번, 세 번 읽고 밑줄 친 데 노트한다. 그렇게 했더니 작년에 20권 읽었는데, 그 중 대여섯 권은 지금도 문장이 기억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은 세 번 읽었고 출근길에 한 챕터씩 또 본다. 60권 시절엔 없던 일이다. 물론 반론도 안다. '재미없어도 끝까지 읽어야 만나는 깊이가 있다', '완독의 근육이 있다'. 일리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200쪽까지 지루하다가 거기서 터지니까. 그래서 요즘 내 기준은 '지루함이 작가의 의도인가, 그냥 안 맞는 건가'를 구분하는 거다. 어렵지만. 완독 강박에 시달리는 분들, 책은 갚아야 할 빚이 아니라는 말 해주고 싶었다. 여러분의 '덮는 기준'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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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한나를읽다·1주 전

우리는 '공론장'을 가진 적이 있긴 한가

하버마스가 말한 부르주아 공론장의 원형은 18세기 런던의 커피하우스였다. 신분과 직업을 잠시 괄호치고, 오직 더 나은 논거가 이기는 공간. 물론 그건 백인 남성 유산계급에 한정된 미화된 기억이라는 비판도 정당하다. 그런데 나는 요즘 다른 질문이 더 절실하다. 우리는 그 비슷한 것이라도 가진 적이 있는가. 광장에 사람이 모이면 공론장이 되는 게 아니다. 광화문에 100만이 모여도, 각자가 이미 정해진 답을 들고 와서 같은 구호를 외치고 흩어지면 그건 집회지 토론이 아니다. 아렌트가 정치의 본질로 본 건 '복수성(plurality)' 속에서 말과 행위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지금 우리의 온라인 공간은 복수성을 견디지 못한다. 다른 의견은 곧 적의 신호로 읽힌다. 나는 이게 단순히 '예의가 없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구조의 문제다. 알고리즘은 분노가 체류시간을 늘린다는 걸 알고, 우리는 동의보다 격분에 더 빨리 반응한다. 이 판 위에서 '근거 중심으로 점잖게 토론하자'는 건 거의 반(反)시장적 제안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이런 공간이 지속 가능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선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봤다. 규칙인가, 사람인가, 아니면 애초에 모이는 사람의 밀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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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보이지않는손·1주 전

부동산 불로소득은 정말 '불로'인가 — 자본이득 과세를 옹호하던 내가 흔들린 지점

나는 오래도록 시장주의자였고, 부동산 양도차익에 높은 세금을 매기는 데 반대해왔다. 그런데 최근 한 가지 논증 때문에 내 입장이 조금 흔들려서, 정리할 겸 글을 쓴다. 반박을 받고 싶다. 전통적으로 시장주의 쪽 논리는 이렇다. 집값 상승분 중 상당 부분은 주인이 '아무것도 안 해서' 생긴 게 아니다. 보유에 따르는 리스크(금리 변동, 하락장에서 깡통 가능성)를 졌고, 유동성을 묶었고, 세금과 유지비를 냈다. 그러니 그 차익은 리스크에 대한 보상이지 불로소득이 아니다. 여기까진 나도 동의한다. 문제는 헨리 조지가 백 몇십 년 전에 지적한 지점이다. 토지 가격 상승분 중 '입지'에서 오는 부분은 소유자가 만든 가치가 아니다. 지하철이 뚫리고, 학군이 좋아지고, 옆 동네에 대기업이 들어와서 오른 값은 사회 전체가 만든 가치다. 건물은 내가 지었지만 땅 밑으로 지나가는 2호선은 내가 깐 게 아니다. 강남 땅값의 상당 부분이 강남 소유주의 노력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 전체가 집적시킨 가치라면, 그 부분을 환수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시장 왜곡 아닌가. 그래서 요즘은 '양도세는 과하다, 하지만 토지보유세(보유 단계의 지대 환수)는 시장주의자라면 오히려 찬성해야 하는 것 아닌가' 쪽으로 기울고 있다. 보유세는 거래를 막지 않으면서 지대를 환수하니까. 다만 실거주 1주택자의 세부담, 현금흐름 없는 은퇴자 문제 같은 현실적 반론이 무겁다. 시장 쪽이든 분배 쪽이든, 이 논증의 약한 고리를 찾아주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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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월급쟁이김씨·1주 전

9년차 직장인이 본 '세대갈등'은 사실 세대 문제가 아니었다

회사에서 세대갈등 워크숍이란 걸 했다. 'MZ는 이렇다, 기성세대는 저렇다' 식의 표를 띄워놓고 서로 이해하자는 자리였는데, 끝나고 나오면서 묘하게 찝찝했다. 우리 팀의 갈등은 나이 차이에서 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40대 팀장이 야근을 당연시하는 건 '꼰대'라서가 아니라, 그분이 입사할 때 부동산이 오르고 있었고 버티면 보상이 따라온다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20대 후배가 '이걸 왜 제가요'라고 묻는 건 싸가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버텨도 집을 못 산다는 걸 일찍 학습했기 때문이다. 둘 다 합리적이다. 같은 게임의 규칙이 중간에 바뀌었을 뿐이다. 나는 '세대'라는 프레임이 사실은 '불평등'과 '저성장'을 가리는 편한 핑계라고 생각하게 됐다. 세대로 묶으면 386 안의 임대인과 비정규직의 천지차이가 안 보인다. 같은 90년대생 안에서도 부모 자산에 따라 출발선이 완전히 다른데, 다 'MZ세대'로 퉁쳐버린다. 갈등을 세대로 번역하는 순간, 우리는 정작 따져야 할 분배 문제를 '어차피 세대차이지'라며 자연현상처럼 넘기게 된다. 워크숍 강사가 마지막에 '서로 이해합시다'라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이해 말고 다른 게 필요한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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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치·한나를읽다·1주 전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말이 면죄부가 되지 않는 이유

회사에서 한 후배가 명백히 잘못된 데이터 처리를 하고 있길래 물었더니 "팀장님이 시켜서요"라고 하더군요. 순간 아렌트가 예루살렘에서 본 아이히만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괴물이 아니라 "맡은 일을 성실히 한 평범한 공무원"이었죠.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거대한 악의 부품이 된다"는 경고였습니다. 핵심은 사유의 포기입니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잔인함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피해자의 자리에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었어요. 그는 클리셰로만 말했습니다. 자기 언어로 생각하는 능력을 반납한 사람이었죠.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문장은 바로 그 사유의 정지를 자백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게 어렵습니다. 위계 조직에서 매번 "이게 옳은가"를 따지는 사람은 피곤한 사람, 적응 못 하는 사람 취급을 받죠. 저는 그 후배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했을까요. "네 책임이야"라고 하기엔 그 구조를 만든 건 후배가 아니고, "어쩔 수 없지"라고 하기엔 그게 바로 아이히만의 논리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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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정언명령·1주 전

선의의 거짓말은 없다 — 칸트 편을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서 인기 없을 주장인 거 압니다. 그래도 한번 진지하게 써봅니다. 거짓말은, 그게 아무리 선의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흔히 드는 반례가 있죠. 살인자가 문을 두드리며 '네 친구 어디 있냐'고 묻는다, 거짓말 안 하면 친구가 죽는다. 칸트는 여기서도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해서 욕을 먹습니다. 그런데 칸트의 진짜 논점은 결과가 아니라 이겁니다. 내가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허용하는 순간, 나는 '필요하면 거짓말해도 된다'는 규칙을 온 세상에 적용 가능한 법칙으로 세우는 거예요. 그 법칙이 보편화되면 '말'이라는 것 자체가 신뢰를 잃고, 거짓말이라는 행위 자체가 성립 불가능해집니다. 거짓말은 진실을 믿는 사람이 있어야만 작동하는 무임승차니까요. 현실에선 저도 흔들립니다. 시한부 환자에게, 상처받을 친구에게, 매번 진실을 말하진 못해요. 다만 저는 그 거짓말을 '어쩔 수 없었다'고 합리화하지 않고 '나는 지금 잘못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게 정직이라고 봅니다. 거짓말을 선의로 포장하는 순간, 우리는 거짓말의 비용을 영원히 안 치르거든요. 반박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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