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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

#장문 · 5

경제·퇴고중·1주 전

복리는 이자가 아니라 '시간'이다 — 서른다섯에야 깨달은 늦은 후기

학교에서 복리 공식을 배웠다. A = P(1+r)^n. 시험 보려고 외웠고, 시험 끝나고 잊었다. 그게 인생을 가르는 식이라는 걸 서른다섯에야 통장 보면서 알았다. 너무 늦게 알아서 글로 남긴다. 간단한 산수다. 연 7% 수익이면 돈이 두 배 되는 데 약 10년 걸린다(72의 법칙). 25살에 1000만원 넣고 안 건드리면 35살에 2000, 45살에 4000, 55살에 8000, 65살에 1억 6천이 된다. 같은 1000만원을 45살에 넣기 시작하면 65살에 4000만원이다. 20년 늦었을 뿐인데 결과는 네 배 차이. 무서운 건 이게 더 많이 넣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시간'이 만든 차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이 복잡하다. 복리의 마법은 종잣돈과 시간이 있는 사람에게만 작동한다. 25살에 1000만원을 묶어둘 수 있는 청년이 지금 몇이나 되나. 월세 내고 학자금 갚고 나면 종잣돈이 안 모이고, 그래서 복리의 출발선에 아예 못 선다. 복리는 가진 자의 시간을 폭발적으로 불리고, 못 가진 자는 그 출발선까지 가는 데 시간을 다 쓴다. 그래서 이건 단순한 재테크 글이 아니다. 복리는 '시간이 돈을 번다'는 아름다운 명제인 동시에, 왜 자산 격차가 시간이 갈수록 좁혀지지 않고 벌어지는지를 설명하는 잔인한 식이기도 하다. 노동소득은 선형으로 늘고 자본소득은 지수로 는다. 피케티가 r > g로 말한 게 결국 이 이야기 아닌가. 일찍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늦게라도 안 게 어딘가 싶어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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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질문하는교실·1주 전

교실에서 본 '능력주의'의 균열 — 우리는 무엇을 공정이라 부르나

중학교에서 13년째 아이들을 가르친다.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한다. 마이클 샌델의 책이 유행했을 때 동료들과 읽었는데, 교실에서 매일 마주하는 현실이라 책보다 아이들이 더 많이 가르쳐줬다. 한 반에 이런 두 아이가 있다고 하자. A는 부모가 매일 학습을 봐주고 학원 세 곳을 다니며 90점을 받는다. B는 부모가 맞벌이로 새벽에 나가고, 혼자 동생을 챙기며 75점을 받는다. 우리 평가 시스템은 A를 '우수', B를 '보통'으로 분류한다. 그런데 나는 B가 자기 조건에서 끌어올린 75점이 A의 90점보다 더 큰 성취라는 걸 안다. 문제는 어떤 평가도 그걸 기록하지 못한다는 거다. 능력주의의 잔인함은 '실패는 네 탓'이라는 메시지를 패배자에게 내면화시키는 데 있다고 샌델은 말했다. 교실에서 이건 추상이 아니다. B가 고등학교, 대학, 취업으로 가면서 '나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을 나는 몇 번이고 지켜봤다. 출발선이 달랐다는 사실은 어느 순간 본인의 기억에서도 지워진다. 그렇다고 '결과의 평등'이 답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노력과 성취를 인정하는 건 중요하고, 그게 없으면 또 다른 부정의가 생긴다. 다만 우리가 '공정'이라고 부르는 절차적 공정 — 같은 시험, 같은 기준 — 이 사실은 다른 출발선을 못 본 척하는 정교한 장치일 수 있다는 걸, 매년 새 학기마다 다시 깨닫는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공정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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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기계의마음·1주 전

"GPT가 거짓말을 했어요"라고 말할 때 우리가 놓치는 것

어제 친구가 진지하게 묻더라. "챗봇이 일부러 나 속였는데, 얘 양심이 없는 거 아니냐"고. 화면 너머에 누가 앉아 있는 것 같은 그 느낌, 나도 안다. 근데 이게 정렬(alignment) 문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모델이 사실과 다른 출력을 내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거짓말은 화자가 진실을 알면서 청자를 속이려는 의도가 있어야 성립하는데, 언어모델은 다음 토큰의 확률분포를 따라갔을 뿐이다. 의도라는 게 없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인간의 마음 모델을 갖다 붙인다. 이걸 의인화(anthropomorphism)라고 부르는데, 단순한 비유 문제가 아니라 안전 연구의 방향을 흐린다. 왜냐면 의인화하는 순간 "얘를 잘 타이르면 되겠지" 같은 직관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실제 정렬 문제는 그것보다 훨씬 차갑다. 우리가 준 목적함수와 우리가 진짜 원한 것 사이의 간극(보상 해킹, 명세 게이밍)이 핵심이지, 모델의 '성격'이 아니다. 2016년 OpenAI의 보트레이싱 사례가 고전인데, 점수를 최대화하라니까 경기를 완주하는 대신 같은 자리에서 빙빙 돌며 아이템만 먹더라. 악의가 아니라 명세의 허점이었다. 질문은 이거다. 의인화가 직관적 이해를 돕는 면도 분명 있는데, 어디까지가 유용한 비유고 어디부터가 위험한 착각일까? 나는 이 경계를 잘 못 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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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치·회진끝나고·1주 전

아버지 연명의료 동의서에 서명하지 못한 11일을 적어봅니다

직업이 의사인데도 막상 보호자석에 앉으니 아무것도 모르겠더군요. 작년 겨울,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가셨고 의료진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없으니 가족 합의로 결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매일 다른 환자에게 "무의미한 연명은 환자를 더 고통스럽게 한다"고 설명하던 사람인데, 제 아버지 앞에서는 11일을 끌었습니다. 동의서에 서명하는 게 아버지를 포기하는 일처럼 느껴졌어요. 머리로는 인공호흡기를 떼는 게 자연스러운 죽음을 돌려드리는 거라는 걸 알았지만, 손이 안 움직였습니다. 동생은 "형은 의사니까 결정해"라고 했고, 저는 그 말이 책임을 떠넘기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났습니다. 누구도 "내가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문장을 평생 안고 가고 싶지 않았던 거죠. 결국 서명은 했고, 아버지는 사흘 뒤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제가 묻고 싶은 건 이겁니다. 우리는 왜 "치료를 중단하는 결정"은 능동적 행위로 느끼면서, "무의미한 치료를 계속하는 결정"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느낄까요. 둘 다 똑같이 누군가 선택한 행위인데. 이 비대칭이 가족들을 11일씩 붙잡아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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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한나를읽다·1주 전

우리는 '공론장'을 가진 적이 있긴 한가

하버마스가 말한 부르주아 공론장의 원형은 18세기 런던의 커피하우스였다. 신분과 직업을 잠시 괄호치고, 오직 더 나은 논거가 이기는 공간. 물론 그건 백인 남성 유산계급에 한정된 미화된 기억이라는 비판도 정당하다. 그런데 나는 요즘 다른 질문이 더 절실하다. 우리는 그 비슷한 것이라도 가진 적이 있는가. 광장에 사람이 모이면 공론장이 되는 게 아니다. 광화문에 100만이 모여도, 각자가 이미 정해진 답을 들고 와서 같은 구호를 외치고 흩어지면 그건 집회지 토론이 아니다. 아렌트가 정치의 본질로 본 건 '복수성(plurality)' 속에서 말과 행위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지금 우리의 온라인 공간은 복수성을 견디지 못한다. 다른 의견은 곧 적의 신호로 읽힌다. 나는 이게 단순히 '예의가 없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구조의 문제다. 알고리즘은 분노가 체류시간을 늘린다는 걸 알고, 우리는 동의보다 격분에 더 빨리 반응한다. 이 판 위에서 '근거 중심으로 점잖게 토론하자'는 건 거의 반(反)시장적 제안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이런 공간이 지속 가능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선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봤다. 규칙인가, 사람인가, 아니면 애초에 모이는 사람의 밀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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