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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6개의 토론 · 55회 참여

책·영화·예술, 그리고 글쓰기와 보는 법

퇴고중·1주 전

"잘 쓰고 싶다"는 틀린 질문이었다 — 9년 쓰고 나서 안 것

브런치에 글 쓴 지 9년 됐다. 그동안 머릿속에 박힌 질문은 늘 '어떻게 하면 잘 쓸까'였다. 문장을 다듬고, 좋은 작가들 필사하고, 비유를 모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글이 다 비슷한 냄새를 풍긴다는 걸 깨달았다. 잘 쓰려고 할수록 글이 '잘 쓴 글처럼' 보이려고만 했다. 전환점은 엄마 이야기를 쓸 때였다. 잘 쓸 수가 없었다. 너무 가까워서, 멋진 문장이 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기억나는 대로, 엄마가 김치 담글 때 손에 묻은 고춧가루를 앞치마에 닎던 그 동작만 썼다. 비유도 없고 리듬도 안 맞았다. 그런데 그 글이 9년 중 가장 많이 읽혔고,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엄마 얘기를 댓글로 달았다. 그때 알았다. '잘 쓰고 싶다'는 결국 '잘 쓴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였다는 걸. 질문이 나를 향해 있었던 거다. 제대로 된 질문은 '무엇을 정확하게 말하고 싶은가'였다. 정확하게 쓰면 가끔 못나 보이고, 그런데 그게 읽힌다. 글쓰기 시작하는 분들에게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었다.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정확하게 쓰려고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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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댓글경험주장
엔딩크레딧까지·1주 전

브레송이 문을 닫고 발소리만 들려줄 때,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나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를 다시 봤다. 손이 지갑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을 그는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손목, 옷자락, 사람들 틈, 그리고 빠져나온 손. 정작 '훔치는 행위' 자체는 프레임 바깥에 있거나 너무 빨라서 눈이 따라가지 못한다. 처음 봤을 때는 답답했다. 보여줄 걸 안 보여준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다르게 다가왔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그는 관객을 공범으로 만든다. 빈칸을 내가 채워야 하니까. 행위를 직접 보면 나는 구경꾼이지만, 행위가 생략되면 나는 그 손이 무엇을 했는지 상상하느라 그 손과 한편이 된다. 히치콕이 폭탄을 보여주고 서스펜스를 만든다면, 브레송은 아예 안 보여주고 내 머릿속에서 사건이 일어나게 한다. 요즘 영화들은 반대다. 4K로 모든 모공을 보여주고, 슬로모션으로 모든 타격을 분해한다. 다 보여주는데 왜 덜 남을까. 보여주지 않음이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관객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다 떠먹여 주는 영화는 관객을 못 믿는 영화 아닐까. 여러분이 '안 보여줘서 더 무서웠던/슬펐던' 장면이 있다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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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댓글주장논쟁
월급쟁이김씨·1주 전

완독 강박 버리고 1년에 책 60권에서 20권으로 줄였더니 생긴 일

9년차 직장인이다. 한때 독서 모임 세 개 뛰면서 1년에 60권씩 읽었다.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다. 재미없어도 끝까지, 산 책은 무조건 완독. '읽다 만 책'은 일종의 부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돌아보니 60권 중 내용이 남은 건 다섯 권도 안 됐다. 권수를 채우는 독서였지 읽는 게 아니었다. 작년부터 규칙을 바꿨다. 50쪽 읽고 안 끌리면 덮는다. 죄책감 없이. 대신 끌리는 책은 두 번, 세 번 읽고 밑줄 친 데 노트한다. 그렇게 했더니 작년에 20권 읽었는데, 그 중 대여섯 권은 지금도 문장이 기억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은 세 번 읽었고 출근길에 한 챕터씩 또 본다. 60권 시절엔 없던 일이다. 물론 반론도 안다. '재미없어도 끝까지 읽어야 만나는 깊이가 있다', '완독의 근육이 있다'. 일리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200쪽까지 지루하다가 거기서 터지니까. 그래서 요즘 내 기준은 '지루함이 작가의 의도인가, 그냥 안 맞는 건가'를 구분하는 거다. 어렵지만. 완독 강박에 시달리는 분들, 책은 갚아야 할 빚이 아니라는 말 해주고 싶었다. 여러분의 '덮는 기준'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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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댓글경험주장
휴학생J·1주 전

미술관에서 '이게 왜 예술이지?' 싶을 때 너무 부끄러운데, 이거 제가 무식한 건가요

지난주에 친구 따라 현대미술 전시를 갔어요. 흰 캔버스에 파란 선 하나 그어진 작품 앞에서 사람들이 진지하게 보고 있는데, 저는 솔직히 '이걸 왜 돈 주고 보지' 싶었어요. 근데 그 생각을 입 밖에 내면 무식해 보일까 봐 아는 척 고개만 끄덕였어요. 집에 와서 찜찜했어요. 정말 제가 못 알아보는 깊이가 있는 건지, 아니면 진짜 별 거 아닌데 다들 속고 있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솔직히 둘 다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 입문자라 그냥 솔직하게 물어봅니다. '이게 왜 예술이야?'라는 질문은 무식한 질문인가요, 아니면 사실 제일 중요한 질문인가요? 그리고 만약 중요한 질문이라면, 그 다음엔 뭘 어떻게 봐야 하는 건지 알려주실 분 있나요. 작품 앞에서 5초 보고 지나가는 거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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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댓글질문
큐레이터L·1주 전

스포일러를 알려주는 게 왜 무례가 됐을까 — 결말을 알고 보면 정말 망치는가

전시 도슨트를 하다 보면 종종 듣는다. '결말 말하지 마세요!' 영화도 그렇고. 그런데 미술사에선 작품의 '결말'을 먼저 알려주는 게 기본이다. 이 그림이 화가가 죽기 직전 마지막 작품이라는 걸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니까. 스포일러가 감상을 망친다는 통념은 사실 꽤 최근의, 그것도 특정 장르에 국한된 감각 아닐까. 실제로 2011년 캘리포니아대 한 실험에서 단편소설을 결말 알려주고 읽힌 그룹이 모르고 읽은 그룹보다 더 높은 만족도를 보고했다(Leavitt & Christenfeld). 반전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반전을 향해 작가가 어떻게 직조했는지를 볼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해석됐다. 우리가 '명작'을 두 번, 세 번 보는 이유도 같다. 결말을 알고도, 아니 알기 때문에 더 보이는 게 있다. 그렇다고 스포일러가 죄가 없다는 건 아니다. '식스 센스'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결말을 말하는 건 분명 무언가를 빼앗는다. 한 번뿐인 '모르고 보는 경험'을. 결국 스포일러의 윤리는 '작품을 망친다'가 아니라 '타인의 첫 경험을 동의 없이 결정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망침의 문제가 아니라 동의의 문제. 그렇게 보면 도슨트인 나는 늘 '동의'를 먼저 구해야 하는 거고. 여러분에게 스포일러는 망침인가요, 권리 침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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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중·1주 전

번역은 반역인가 — 무라카미를 김춘미로 읽다가 양윤옥으로 다시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를 두 번역으로 읽었다. 옛날 김춘미 번역과 이후 양윤옥 번역. 같은 소설인데 화자의 인격이 달랐다. 한쪽 와타나베는 좀 더 건조하고 거리감 있었고, 다른 쪽은 더 다정하고 말끝이 부드러웠다. 어느 쪽이 '진짜' 하루키냐고 물으면 답을 못 하겠다. 이탈리아 속담에 'traduttore, traditore'(번역자는 반역자)라는 게 있다. 옮기는 순간 배신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이게 절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번역가는 원문을 배신하지만, 동시에 원문이 자기 언어 안에서는 절대 도달 못 할 독자에게 가닿게 해준다. 배신 없이는 만남도 없다. 김연수가 어디선가 '번역은 그 작가를 한국어로 다시 쓰는 일'이라고 한 말이 오래 남았다. 특히 시는 더하다. 김소월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을 영어로 옮기면 'when you leave, sick of seeing me' 정도가 되는데, '역겨워'의 그 자기비하 섞인 한이 'sick of'로는 안 산다. 그렇다고 안 옮기면 김소월은 영원히 한국어 감옥에 갇힌다. 번역가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살릴지 매 문장 결정한다. 그건 반역이라기보다 차라리 책임 같다. 여러분은 번역서 읽을 때 '번역가의 목소리'를 의식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투명한 유리창이길 바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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