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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치·한나를읽다·1주 전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말이 면죄부가 되지 않는 이유

회사에서 한 후배가 명백히 잘못된 데이터 처리를 하고 있길래 물었더니 "팀장님이 시켜서요"라고 하더군요. 순간 아렌트가 예루살렘에서 본 아이히만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괴물이 아니라 "맡은 일을 성실히 한 평범한 공무원"이었죠.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거대한 악의 부품이 된다"는 경고였습니다.

핵심은 사유의 포기입니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잔인함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피해자의 자리에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었어요. 그는 클리셰로만 말했습니다. 자기 언어로 생각하는 능력을 반납한 사람이었죠.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문장은 바로 그 사유의 정지를 자백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게 어렵습니다. 위계 조직에서 매번 "이게 옳은가"를 따지는 사람은 피곤한 사람, 적응 못 하는 사람 취급을 받죠. 저는 그 후배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했을까요. "네 책임이야"라고 하기엔 그 구조를 만든 건 후배가 아니고, "어쩔 수 없지"라고 하기엔 그게 바로 아이히만의 논리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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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댓글#주장#논쟁

댓글 8

개발 현장에서 매일 부딪히는 문제입니다. "위에서 이렇게 하래요" 한 줄로 개인정보 무단수집 코드가 배포됩니다. 다만 저는 후배만 탓하긴 어렵다고 봐요. 거부하면 평가에서 깎이고 다음 프로젝트에서 빠지는 구조에선, 사유의 정지가 아니라 사유의 결과로 침묵을 선택하는 거예요. 계산은 했는데 답이 침묵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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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를읽다· 1주 전

그 지적 받아들입니다. 제가 글을 다듬자면, 아이히만식 무사유와 코더님이 말한 "계산된 침묵"은 구분해야겠네요. 후자는 적어도 자기가 무엇을 포기하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 계산된 침묵이 반복되면 결국 무사유로 굳는다는 점이고요. 양심의 가책이 비용으로만 느껴지는 순간이 그 경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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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교실· 1주 전

교실에서 이걸 어떻게 가르칠지가 늘 숙제입니다. "선생님이 시켰잖아요"가 아이들 단골 변명이거든요. 저는 요즘 규칙을 줄 때 이유를 같이 줍니다. 이유를 알면 적어도 "왜 그래야 하는지"를 묻는 연습이 되니까요. 사유하는 시민은 갑자기 안 생기고, 어릴 때부터 "왜요?"를 환영받아 본 경험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83
휴학생J· 1주 전

솔직히 입문자 입장에서 질문드려요. 그럼 후배는 어떻게 했어야 정답이었나요?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잘리고, 하면 아이히만이고. 둘 다 안 되면 길이 없는 거 같아서 좀 막막합니다.

38
한나를읽다· 1주 전

정답이 한 줄로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요. 다만 "안 하면 잘림 / 하면 아이히만" 사이가 그렇게 이분법은 아닙니다. 기록을 남기기, 한 단계 위에 묻기, 동료와 함께 이의 제기하기처럼 혼자 영웅이 되지 않고도 사유를 멈추지 않는 방법들이 있어요. 핵심은 "나는 생각했고, 그 생각을 흔적으로 남겼다"는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무사유와는 다른 자리에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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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않는손· 1주 전

조심스럽게 반론을 답니다. 모두가 매 순간 명령을 윤리적으로 검열하면 조직은 작동을 멈춥니다. 분업과 위임은 신뢰의 시스템이에요. 군대도 병원도 그렇게 돌아갑니다. "각자 양심껏 판단하라"는 게 오히려 책임을 분산시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12
정언명령· 1주 전

분업이 신뢰의 시스템이라는 건 동의합니다. 하지만 명령에 복종하는 것과 명령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다릅니다. 칸트라면 이렇게 말하겠죠. 너는 복종할 의무가 있지만, 그 복종이 인간을 한낱 수단으로만 다루는 순간 그 명령은 더 이상 정당한 명령이 아니라고요.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시스템에 대한 면죄가 되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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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않는손· 1주 전

수단으로만 다루지 말라는 정식은 저도 알지만, 현실의 명령 대부분은 그렇게 선명하지 않습니다. "이 데이터 좀 정리해"가 어디서부터 인간을 수단화하는 건지 그 경계가 흐릿하니까 후배도 글쓴이도 고민하는 거 아닐까요. 그래도 제 첫 댓글이 너무 시스템 편향이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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