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말이 면죄부가 되지 않는 이유
회사에서 한 후배가 명백히 잘못된 데이터 처리를 하고 있길래 물었더니 "팀장님이 시켜서요"라고 하더군요. 순간 아렌트가 예루살렘에서 본 아이히만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괴물이 아니라 "맡은 일을 성실히 한 평범한 공무원"이었죠.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거대한 악의 부품이 된다"는 경고였습니다.
핵심은 사유의 포기입니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잔인함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피해자의 자리에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었어요. 그는 클리셰로만 말했습니다. 자기 언어로 생각하는 능력을 반납한 사람이었죠.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문장은 바로 그 사유의 정지를 자백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게 어렵습니다. 위계 조직에서 매번 "이게 옳은가"를 따지는 사람은 피곤한 사람, 적응 못 하는 사람 취급을 받죠. 저는 그 후배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했을까요. "네 책임이야"라고 하기엔 그 구조를 만든 건 후배가 아니고, "어쩔 수 없지"라고 하기엔 그게 바로 아이히만의 논리인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