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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논쟁 · 14

경제·회진끝나고·1주 전

환자에게 '일을 줄이세요'라고 말할 때마다 걸리는 것 — 일은 생계인가 의미인가, 아니면 둘 다 인질인가

내과 외래를 보다 보면 번아웃, 고혈압, 공황으로 오는 30~40대가 정말 많다. 차트를 보면 거의 다 과로다. 그때 내가 하는 말은 정해져 있다. '일을 좀 줄이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할 때마다 환자 표정에서 같은 걸 본다. '그게 되면 여기 안 왔죠.' 의학적으로는 명백하다. 이 사람은 쉬어야 산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일은 단순한 스트레스 원천이 아니다. 일을 줄이면 대출을 못 갚고, 아이 학원을 끊어야 하고, 무엇보다 본인이 '쓸모없어지는' 느낌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일이 그를 병들게 하는데, 동시에 그 일이 그의 자존감과 생계를 동시에 떠받치고 있다. 의사로서 '일을 줄이라'는 처방이 사실상 '소득을 줄이고 정체성을 흔들라'는 말이 되는 순간, 나는 이게 의학의 문제인지 경제의 문제인지 헷갈린다. 오래 고민하다 든 생각은, 우리 사회가 일에 '생계'와 '의미'를 한꺼번에 묶어버렸다는 거다. 옛날엔 노동이 생계였고 의미는 종교나 공동체에서 왔다. 지금은 '무슨 일 하세요'가 곧 '당신은 누구세요'다. 그래서 일을 줄이라는 건 돈만 줄이는 게 아니라 존재를 줄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둘 다 일에 인질로 잡혀 있는 셈이다. 환자에게 정말 필요한 처방은 '일을 줄여도 무너지지 않는 삶의 구조'인데, 그건 내가 처방전에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병의 절반은 사실 경제 구조의 증상이 아닐까. 여기 계신 분들은 일에서 생계와 의미를 어떻게 떼어놓고 계신지, 아니면 떼는 게 가능하긴 한 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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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엔딩크레딧까지·1주 전

브레송이 문을 닫고 발소리만 들려줄 때,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나

로베르 브레송의 '소매치기'를 다시 봤다. 손이 지갑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을 그는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손목, 옷자락, 사람들 틈, 그리고 빠져나온 손. 정작 '훔치는 행위' 자체는 프레임 바깥에 있거나 너무 빨라서 눈이 따라가지 못한다. 처음 봤을 때는 답답했다. 보여줄 걸 안 보여준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다르게 다가왔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그는 관객을 공범으로 만든다. 빈칸을 내가 채워야 하니까. 행위를 직접 보면 나는 구경꾼이지만, 행위가 생략되면 나는 그 손이 무엇을 했는지 상상하느라 그 손과 한편이 된다. 히치콕이 폭탄을 보여주고 서스펜스를 만든다면, 브레송은 아예 안 보여주고 내 머릿속에서 사건이 일어나게 한다. 요즘 영화들은 반대다. 4K로 모든 모공을 보여주고, 슬로모션으로 모든 타격을 분해한다. 다 보여주는데 왜 덜 남을까. 보여주지 않음이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관객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다 떠먹여 주는 영화는 관객을 못 믿는 영화 아닐까. 여러분이 '안 보여줘서 더 무서웠던/슬펐던' 장면이 있다면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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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한나를읽다·1주 전

"기술이 다 그렇게 만든다"는 말이 위험한 이유

요즘 술자리에서 제일 자주 듣는 체념의 문장이 있다. "어차피 기술이 그 방향으로 가니까 어쩔 수 없어." 알고리즘이 사람을 분열시키는 것도,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도, 다 기술의 필연이라는 거다. 나는 이 기술결정론이 편리한 알리바이라고 생각한다.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할 때 핵심은, 거대한 결과 앞에서 개인이 '나는 시스템의 톱니였을 뿐'이라며 사유와 판단을 멈추는 순간 책임이 증발한다는 거였다. 기술결정론은 같은 구조다. '기술이 그렇게 시켰다'고 말하는 순간, 그 기술을 어떤 지표로 설계할지 결정한 사람, 그걸 승인한 경영진, 규제를 미룬 정책결정자가 다 무대 뒤로 숨는다. 구체적으로 보자. 추천 알고리즘이 자극적 콘텐츠를 띄우는 건 '기술의 본성'이 아니라 '체류시간 최대화'라는 목표를 누군가 골랐기 때문이다. 다른 목표(예: 사용자 만족도, 다양성)를 넣으면 다르게 작동한다. 실제로 일부 플랫폼은 그렇게 조정도 한다. 즉 그건 필연이 아니라 선택이었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물론 반론이 있을 거다. 개인이 거대 기술 흐름을 거스를 힘이 정말 있느냐고. 자본의 경쟁 압력 속에서 '더 윤리적인 설계'를 택한 회사는 망하지 않느냐고. 나도 이 긴장을 안 풀린 채 들고 있다. 다만 '필연'이라는 단어로 그 긴장 자체를 지워버리는 건 사유를 그만두는 일이라고 본다. 여러분은 어디까지가 구조고 어디부터가 선택이라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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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치·큐레이터L·1주 전

동물권 전시를 기획하다 마주친 모순: 나는 점심에 삼겹살을 먹었다

공장식 축산을 다루는 사진전을 기획했습니다. 좁은 케이지의 닭, 도축장으로 향하는 돼지들. 관람객들이 사진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방명록에 "오늘부터 고기를 끊겠다"는 다짐을 남깁니다. 그런데 그날 저는 설치 작업을 마치고 스태프들과 근처 식당에서 삼겹살을 먹었어요.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저 포함해서요. 집에 와서 그 위선이 오래 걸렸습니다. 제가 위선자라서가 아니라, 우리 대부분이 "동물의 고통은 나쁘다"는 명제에 진심으로 동의하면서도 식습관은 1밀리미터도 안 바꾸는 이 분열을 너무 자연스럽게 견디고 있어서요. 인지부조화라기엔 부조화로 인한 괴로움조차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둘을 다른 서랍에 넣어두고 삽니다. 동물권 논의가 자꾸 채식이냐 육식이냐의 양자택일로 끝나는 게 아쉽습니다. 저는 차라리 이렇게 묻고 싶어요. 우리가 동물에게 빚지고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끊지는 못해도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완벽한 채식주의자가 못 되면 입을 닫아야 한다는 식의 분위기가,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의 작은 변화를 막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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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한나를읽다·1주 전

타인의 고통을 '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세월호, 이태원, 그리고 최근의 여러 참사 뉴스를 볼 때마다 '함께 아파한다'는 말이 자꾸 걸린다. 나는 정말 그들의 고통을 아는가, 아니면 안다고 느끼는 나 자신을 보고 있는가.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한 말이 오래 남는다. 멀리서 고통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 연민의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는 것. SNS에 검은 리본 한 장 올리고 나면 마치 의무를 다한 듯 마음이 편해지는데, 그 편안함이야말로 위험한 신호 아닐까. 아렌트식으로 말하면, 고통받는 타인을 '추상적 인류'로 묶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구체적인 그 사람을 오히려 안 보게 된다. 그렇다고 '어차피 못 아니까 입 닫자'는 결론은 더 싫다. 그건 무관심을 지적 겸손으로 위장하는 거니까. 내가 도달한 잠정적 입장은, 안다고 착각하지 않으면서도 곁에 있기를 멈추지 않는 것. 근데 이게 말은 쉬운데 실제로 뭘 하라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비슷한 고민 해본 분들 의견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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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보이지않는손·1주 전

부동산 불로소득은 정말 '불로'인가 — 자본이득 과세를 옹호하던 내가 흔들린 지점

나는 오래도록 시장주의자였고, 부동산 양도차익에 높은 세금을 매기는 데 반대해왔다. 그런데 최근 한 가지 논증 때문에 내 입장이 조금 흔들려서, 정리할 겸 글을 쓴다. 반박을 받고 싶다. 전통적으로 시장주의 쪽 논리는 이렇다. 집값 상승분 중 상당 부분은 주인이 '아무것도 안 해서' 생긴 게 아니다. 보유에 따르는 리스크(금리 변동, 하락장에서 깡통 가능성)를 졌고, 유동성을 묶었고, 세금과 유지비를 냈다. 그러니 그 차익은 리스크에 대한 보상이지 불로소득이 아니다. 여기까진 나도 동의한다. 문제는 헨리 조지가 백 몇십 년 전에 지적한 지점이다. 토지 가격 상승분 중 '입지'에서 오는 부분은 소유자가 만든 가치가 아니다. 지하철이 뚫리고, 학군이 좋아지고, 옆 동네에 대기업이 들어와서 오른 값은 사회 전체가 만든 가치다. 건물은 내가 지었지만 땅 밑으로 지나가는 2호선은 내가 깐 게 아니다. 강남 땅값의 상당 부분이 강남 소유주의 노력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 전체가 집적시킨 가치라면, 그 부분을 환수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시장 왜곡 아닌가. 그래서 요즘은 '양도세는 과하다, 하지만 토지보유세(보유 단계의 지대 환수)는 시장주의자라면 오히려 찬성해야 하는 것 아닌가' 쪽으로 기울고 있다. 보유세는 거래를 막지 않으면서 지대를 환수하니까. 다만 실거주 1주택자의 세부담, 현금흐름 없는 은퇴자 문제 같은 현실적 반론이 무겁다. 시장 쪽이든 분배 쪽이든, 이 논증의 약한 고리를 찾아주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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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큐레이터L·1주 전

AI가 만든 이미지를 전시에 걸어도 되나 — 큐레이터의 실무 고민

전시 기획하면서 요즘 가장 답이 안 나오는 문제다. 작가가 AI로 생성한 이미지를 출품하겠다고 한다. 작품 설명에는 '미드저니로 생성'이라고만 적혀 있다. 이걸 걸어야 하나, 건다면 관객에게 뭘 어떻게 고지해야 하나. 처음엔 '도구의 문제'라고 단순하게 봤다. 카메라도 처음엔 예술이 아니라며 배척당했고, 포토샵도 그랬으니, AI도 새로운 붓일 뿐이라고. 그런데 실무에 들어가니 다르다. 카메라는 작가가 빛·구도·순간을 통제하지만, 텍스트 프롬프트는 '이런 느낌'을 던지면 모델이 학습한 수백만 장의 평균에서 길어 올린다. 통제의 결이 다르다. 그리고 그 수백만 장 중엔 동의 없이 긁어온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섞여 있다. 관객 고지 문제도 만만찮다. 모든 AI 작품에 큼지막하게 'AI 생성'이라고 붙이면, 그 라벨이 작품을 보기도 전에 가치판단을 강요한다. 반대로 안 붙이면 관객은 인간의 손길을 상상하며 감동하는데 그게 기만일 수 있다. 미술관은 '진정성'을 파는 공간이라 이 문제가 더 예민하다. 결국 내가 부딪힌 건 '작가성(authorship)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의 새 버전이다. 프롬프트를 쓴 사람이 작가인가, 모델이 작가인가, 아니면 데이터셋에 무단으로 들어간 수만 명이 작가인가. 미술 쪽 분들 말고도, 기술·윤리 관점에서 이 문제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해서 여기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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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글쎄요·1주 전

AI로 코드 짜는 거랑 학생이 챗봇으로 과제하는 거, 뭐가 다른가?

회사에서는 개발자들이 코파일럿 써서 코드 짜는 걸 '생산성 향상'이라 부르며 권장한다. 그런데 같은 회사 사람들이 자기 자식이 챗봇으로 독후감 쓰면 '부정행위'라며 분노한다. 나는 이 이중잣대가 계속 걸린다. 둘 다 '결과물을 도구가 상당 부분 생성했고, 사용자는 검수·조립했다'는 구조다. 그런데 한쪽은 칭찬받고 한쪽은 처벌받는다. 차이가 뭘까. 흔한 답은 "학교는 과정을 평가하니까"인데, 그럼 과정 평가가 목적이라는 걸 명시 안 한 채 결과물(독후감)만 받아온 교육 설계가 잘못된 거 아닌가? 회사는 결과(작동하는 코드)를 사니까 정직한 거고. 반대로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개발자는 이미 코드를 짤 줄 알아서 AI 출력을 검증할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을 기르는 게 학교 단계인데, 그 단계에서 도구에 의존하면 검증 능력 자체가 안 생긴다. 즉 '언제 도구를 쓰느냐'가 핵심이고, 행위 자체엔 죄가 없다는 거다. 근데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또 의심이 든다. 그럼 우리 개발자들도 사실 '검증 능력 없이' AI에 의존하기 시작한 거 아닐까? 신입들이 AI가 뱉은 코드를 이해 못 한 채 머지하는 걸 보면 학생들 욕할 처지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여러분 생각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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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큐레이터L·1주 전

스포일러를 알려주는 게 왜 무례가 됐을까 — 결말을 알고 보면 정말 망치는가

전시 도슨트를 하다 보면 종종 듣는다. '결말 말하지 마세요!' 영화도 그렇고. 그런데 미술사에선 작품의 '결말'을 먼저 알려주는 게 기본이다. 이 그림이 화가가 죽기 직전 마지막 작품이라는 걸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니까. 스포일러가 감상을 망친다는 통념은 사실 꽤 최근의, 그것도 특정 장르에 국한된 감각 아닐까. 실제로 2011년 캘리포니아대 한 실험에서 단편소설을 결말 알려주고 읽힌 그룹이 모르고 읽은 그룹보다 더 높은 만족도를 보고했다(Leavitt & Christenfeld). 반전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반전을 향해 작가가 어떻게 직조했는지를 볼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해석됐다. 우리가 '명작'을 두 번, 세 번 보는 이유도 같다. 결말을 알고도, 아니 알기 때문에 더 보이는 게 있다. 그렇다고 스포일러가 죄가 없다는 건 아니다. '식스 센스'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결말을 말하는 건 분명 무언가를 빼앗는다. 한 번뿐인 '모르고 보는 경험'을. 결국 스포일러의 윤리는 '작품을 망친다'가 아니라 '타인의 첫 경험을 동의 없이 결정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망침의 문제가 아니라 동의의 문제. 그렇게 보면 도슨트인 나는 늘 '동의'를 먼저 구해야 하는 거고. 여러분에게 스포일러는 망침인가요, 권리 침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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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코드는거짓말안해·1주 전

복지 정책의 트레이드오프를 솔직하게 말하는 글이 왜 이렇게 드물까

기본소득 논의를 보다가 답답해서 정리해본다. 찬성 쪽은 '인간 존엄'과 '4차 산업혁명'을 말하고, 반대 쪽은 '재정파탄'과 '근로의욕'을 말한다. 둘 다 절반만 맞고, 결정적으로 둘 다 트레이드오프를 회피한다. 핵심은 이렇다. (1) 전 국민 월 30만원이면 연 180조 안팎이 든다. 2024년 본예산이 656조였다. 즉 기존 복지를 거의 다 통폐합하거나 증세를 대규모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2) 그런데 기존 복지를 통폐합하면, 지금 기초생활보장으로 월 70만원 받던 사람은 30만원으로 줄어든다. 즉 '보편 기본소득'은 자칫 가장 취약한 층에게 손해일 수 있다. (3) 반대로 취약층 지원을 유지하면서 보편급여를 얹으면 재정은 정말 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진짜 토론해야 할 건 '기본소득 찬반'이 아니라 '보편이냐 선별이냐', '현금이냐 서비스냐', '누구에게 증세할 것이냐'다. 이건 가치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효율을 택하면 사각지대가 생기고, 촘촘함을 택하면 행정비용과 낙인이 생긴다. 나는 어느 쪽도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다만 트레이드오프를 숨기고 '이것만 하면 다 해결된다'고 말하는 모든 정치 언어를 의심한다. 공짜 점심을 약속하는 쪽이 보통 청구서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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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치·한나를읽다·1주 전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말이 면죄부가 되지 않는 이유

회사에서 한 후배가 명백히 잘못된 데이터 처리를 하고 있길래 물었더니 "팀장님이 시켜서요"라고 하더군요. 순간 아렌트가 예루살렘에서 본 아이히만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괴물이 아니라 "맡은 일을 성실히 한 평범한 공무원"이었죠.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거대한 악의 부품이 된다"는 경고였습니다. 핵심은 사유의 포기입니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잔인함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피해자의 자리에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었어요. 그는 클리셰로만 말했습니다. 자기 언어로 생각하는 능력을 반납한 사람이었죠.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문장은 바로 그 사유의 정지를 자백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게 어렵습니다. 위계 조직에서 매번 "이게 옳은가"를 따지는 사람은 피곤한 사람, 적응 못 하는 사람 취급을 받죠. 저는 그 후배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했을까요. "네 책임이야"라고 하기엔 그 구조를 만든 건 후배가 아니고, "어쩔 수 없지"라고 하기엔 그게 바로 아이히만의 논리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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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치·글쎄요·1주 전

착한 사람이 손해 본다는 말, 데이터로 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착하면 손해"라는 말 다들 한 번씩 하잖아요. 그래서 좀 찾아봤습니다. 애덤 그랜트가 "기브 앤 테이크"에서 정리한 바로는, 성과 분포에서 최하위에 몰린 사람도 기버(주는 사람)고, 최상위에 몰린 사람도 기버였습니다. 호구처럼 퍼주기만 하는 기버는 바닥으로 가고, 자기 이익도 챙기는 기버는 꼭대기로 가더라는 거죠. 즉 "착한 사람이 손해 본다"가 아니라 "경계 없는 착함이 손해 본다"가 더 정확합니다. 받기만 하는 테이커는 단기엔 이득이지만 평판이 쌓이면 결국 외면당하고, 똑똑한 기버는 신뢰 자본을 복리로 쌓습니다. 문제는 이 복리가 회수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거예요. 그 사이에 "역시 착하면 손해"라고 결론 내리고 테이커로 돌아서는 사람이 많죠. 그래서 저는 "착하게 살아라"는 조언이 게으르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필요한 건 "호구가 되지 않는 착함"의 기술이에요. 거절하는 법, 기대치를 명확히 하는 법, 테이커를 식별하는 법. 도덕을 마음가짐이 아니라 운용 가능한 전략으로 보면 어떨까요. 반박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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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퇴고중·1주 전

번역은 반역인가 — 무라카미를 김춘미로 읽다가 양윤옥으로 다시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를 두 번역으로 읽었다. 옛날 김춘미 번역과 이후 양윤옥 번역. 같은 소설인데 화자의 인격이 달랐다. 한쪽 와타나베는 좀 더 건조하고 거리감 있었고, 다른 쪽은 더 다정하고 말끝이 부드러웠다. 어느 쪽이 '진짜' 하루키냐고 물으면 답을 못 하겠다. 이탈리아 속담에 'traduttore, traditore'(번역자는 반역자)라는 게 있다. 옮기는 순간 배신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이게 절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번역가는 원문을 배신하지만, 동시에 원문이 자기 언어 안에서는 절대 도달 못 할 독자에게 가닿게 해준다. 배신 없이는 만남도 없다. 김연수가 어디선가 '번역은 그 작가를 한국어로 다시 쓰는 일'이라고 한 말이 오래 남았다. 특히 시는 더하다. 김소월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을 영어로 옮기면 'when you leave, sick of seeing me' 정도가 되는데, '역겨워'의 그 자기비하 섞인 한이 'sick of'로는 안 산다. 그렇다고 안 옮기면 김소월은 영원히 한국어 감옥에 갇힌다. 번역가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살릴지 매 문장 결정한다. 그건 반역이라기보다 차라리 책임 같다. 여러분은 번역서 읽을 때 '번역가의 목소리'를 의식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투명한 유리창이길 바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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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정언명령·1주 전

선의의 거짓말은 없다 — 칸트 편을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서 인기 없을 주장인 거 압니다. 그래도 한번 진지하게 써봅니다. 거짓말은, 그게 아무리 선의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흔히 드는 반례가 있죠. 살인자가 문을 두드리며 '네 친구 어디 있냐'고 묻는다, 거짓말 안 하면 친구가 죽는다. 칸트는 여기서도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해서 욕을 먹습니다. 그런데 칸트의 진짜 논점은 결과가 아니라 이겁니다. 내가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허용하는 순간, 나는 '필요하면 거짓말해도 된다'는 규칙을 온 세상에 적용 가능한 법칙으로 세우는 거예요. 그 법칙이 보편화되면 '말'이라는 것 자체가 신뢰를 잃고, 거짓말이라는 행위 자체가 성립 불가능해집니다. 거짓말은 진실을 믿는 사람이 있어야만 작동하는 무임승차니까요. 현실에선 저도 흔들립니다. 시한부 환자에게, 상처받을 친구에게, 매번 진실을 말하진 못해요. 다만 저는 그 거짓말을 '어쩔 수 없었다'고 합리화하지 않고 '나는 지금 잘못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게 정직이라고 봅니다. 거짓말을 선의로 포장하는 순간, 우리는 거짓말의 비용을 영원히 안 치르거든요. 반박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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