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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경험 · 13

경제·퇴고중·1주 전

복리는 이자가 아니라 '시간'이다 — 서른다섯에야 깨달은 늦은 후기

학교에서 복리 공식을 배웠다. A = P(1+r)^n. 시험 보려고 외웠고, 시험 끝나고 잊었다. 그게 인생을 가르는 식이라는 걸 서른다섯에야 통장 보면서 알았다. 너무 늦게 알아서 글로 남긴다. 간단한 산수다. 연 7% 수익이면 돈이 두 배 되는 데 약 10년 걸린다(72의 법칙). 25살에 1000만원 넣고 안 건드리면 35살에 2000, 45살에 4000, 55살에 8000, 65살에 1억 6천이 된다. 같은 1000만원을 45살에 넣기 시작하면 65살에 4000만원이다. 20년 늦었을 뿐인데 결과는 네 배 차이. 무서운 건 이게 더 많이 넣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시간'이 만든 차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이 복잡하다. 복리의 마법은 종잣돈과 시간이 있는 사람에게만 작동한다. 25살에 1000만원을 묶어둘 수 있는 청년이 지금 몇이나 되나. 월세 내고 학자금 갚고 나면 종잣돈이 안 모이고, 그래서 복리의 출발선에 아예 못 선다. 복리는 가진 자의 시간을 폭발적으로 불리고, 못 가진 자는 그 출발선까지 가는 데 시간을 다 쓴다. 그래서 이건 단순한 재테크 글이 아니다. 복리는 '시간이 돈을 번다'는 아름다운 명제인 동시에, 왜 자산 격차가 시간이 갈수록 좁혀지지 않고 벌어지는지를 설명하는 잔인한 식이기도 하다. 노동소득은 선형으로 늘고 자본소득은 지수로 는다. 피케티가 r > g로 말한 게 결국 이 이야기 아닌가. 일찍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늦게라도 안 게 어딘가 싶어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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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월급쟁이김씨·1주 전

9년차인데 첫 직장보다 통장이 더 가볍습니다 — 실질임금이라는 단어를 몸으로 배운 후기

2016년에 신입으로 받던 실수령이 230쯤이었다. 지금 9년차, 명목으로는 380 받는다. 숫자만 보면 1.6배다. 그런데 왜 통장은 더 가벼운가. 작년에 진지하게 가계부를 엑셀로 다시 짜봤다. 그러다 '실질임금'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이해했다. 2016년 서울 원룸 보증금 1000에 월 45였다. 지금 비슷한 동네는 보증금 2000에 월 70~80이다. 점심값은 6500원에서 만원이 기본선이 됐고, 회식 안 해도 그렇다. 통계청 소비자물가지수로 환산해보니 내 380은 2016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대략 300 초반밖에 안 된다. 명목 1.6배 올랐는데 구매력은 1.3배 남짓. 그 사이 나는 야근을 더 했고 책임은 비교도 안 되게 무거워졌다. 무서운 건 이게 '나만 못 벌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은행이나 통계청 자료 보면 실질임금 증가율이 몇 년째 거의 멈춰 있거나 마이너스인 해도 있었다. 우리는 다들 명목 숫자가 오르는 걸 보면서 '그래도 나아지고 있다'고 자기최면을 거는데, 물가가 그 숫자를 조용히 갉아먹는다. 연봉협상 때 5% 올랐다고 좋아했던 게 물가 3.6% 시절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을 때의 허탈함. 질문은 이거다. 우리는 왜 명목임금의 숫자에 그렇게 쉽게 안심하는가. 그리고 회사와 협상할 때 '물가만큼은 보장'이라는 게 왜 당연한 출발선이 아니라 매번 싸워야 얻는 양보처럼 느껴지는가. 비슷하게 느끼는 분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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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회진끝나고·1주 전

환자에게 '일을 줄이세요'라고 말할 때마다 걸리는 것 — 일은 생계인가 의미인가, 아니면 둘 다 인질인가

내과 외래를 보다 보면 번아웃, 고혈압, 공황으로 오는 30~40대가 정말 많다. 차트를 보면 거의 다 과로다. 그때 내가 하는 말은 정해져 있다. '일을 좀 줄이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할 때마다 환자 표정에서 같은 걸 본다. '그게 되면 여기 안 왔죠.' 의학적으로는 명백하다. 이 사람은 쉬어야 산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일은 단순한 스트레스 원천이 아니다. 일을 줄이면 대출을 못 갚고, 아이 학원을 끊어야 하고, 무엇보다 본인이 '쓸모없어지는' 느낌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일이 그를 병들게 하는데, 동시에 그 일이 그의 자존감과 생계를 동시에 떠받치고 있다. 의사로서 '일을 줄이라'는 처방이 사실상 '소득을 줄이고 정체성을 흔들라'는 말이 되는 순간, 나는 이게 의학의 문제인지 경제의 문제인지 헷갈린다. 오래 고민하다 든 생각은, 우리 사회가 일에 '생계'와 '의미'를 한꺼번에 묶어버렸다는 거다. 옛날엔 노동이 생계였고 의미는 종교나 공동체에서 왔다. 지금은 '무슨 일 하세요'가 곧 '당신은 누구세요'다. 그래서 일을 줄이라는 건 돈만 줄이는 게 아니라 존재를 줄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둘 다 일에 인질로 잡혀 있는 셈이다. 환자에게 정말 필요한 처방은 '일을 줄여도 무너지지 않는 삶의 구조'인데, 그건 내가 처방전에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병의 절반은 사실 경제 구조의 증상이 아닐까. 여기 계신 분들은 일에서 생계와 의미를 어떻게 떼어놓고 계신지, 아니면 떼는 게 가능하긴 한 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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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보이지않는손·1주 전

행복은 추구할수록 멀어진다 — 9년치 가계부를 들여다보고 내린 잠정 결론

시장주의자로 토론장에 자주 글 쓰는 사람인데, 오늘은 좀 다른 얘기다. 최근에 9년치 가계부랑 그때그때 적어둔 만족도 메모를 엑셀로 합쳐봤다. '행복을 사는 데 돈이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데이터로 보고 싶었다. 결과가 내 입장을 좀 흔들었다. 큰돈 쓴 이벤트들(해외여행, 차 바꾸기, 비싼 시계)은 만족도 그래프에서 날카로운 봉우리를 만들었다가 평균 3주 만에 원래 수준으로 돌아왔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쾌락 적응이 내 가계부에 그대로 찍혀 있었다. 반대로 만족도 바닥선 자체를 꾸준히 올려준 건 돈이 거의 안 든 것들이었다. 주 3회 달리기, 같은 사람들과 매주 하는 독서모임, 자기 전 10분 일기. 봉우리는 못 만들지만 바닥을 올리는 항목들. 여기서 든 생각. 우리는 행복을 '봉우리'로 상상하고 그걸 사려고 돈을 쓰는데, 실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건 '바닥선'이더라. 그리고 행복을 직접 목표로 조준하면 봉우리만 좇게 돼서 오히려 바닥이 무너진다. 밀이 말한 '행복은 곁눈질로만 잡힌다'는 게 이거였나 싶다. 행복을 목표가 아니라 좋은 활동의 부산물로 두는 것. 시장으로 행복을 사려던 나한테는 좀 뼈아픈 결론이다. 반박이나 다른 데이터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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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질문하는교실·1주 전

교실에서 본 '능력주의'의 균열 — 우리는 무엇을 공정이라 부르나

중학교에서 13년째 아이들을 가르친다.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한다. 마이클 샌델의 책이 유행했을 때 동료들과 읽었는데, 교실에서 매일 마주하는 현실이라 책보다 아이들이 더 많이 가르쳐줬다. 한 반에 이런 두 아이가 있다고 하자. A는 부모가 매일 학습을 봐주고 학원 세 곳을 다니며 90점을 받는다. B는 부모가 맞벌이로 새벽에 나가고, 혼자 동생을 챙기며 75점을 받는다. 우리 평가 시스템은 A를 '우수', B를 '보통'으로 분류한다. 그런데 나는 B가 자기 조건에서 끌어올린 75점이 A의 90점보다 더 큰 성취라는 걸 안다. 문제는 어떤 평가도 그걸 기록하지 못한다는 거다. 능력주의의 잔인함은 '실패는 네 탓'이라는 메시지를 패배자에게 내면화시키는 데 있다고 샌델은 말했다. 교실에서 이건 추상이 아니다. B가 고등학교, 대학, 취업으로 가면서 '나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을 나는 몇 번이고 지켜봤다. 출발선이 달랐다는 사실은 어느 순간 본인의 기억에서도 지워진다. 그렇다고 '결과의 평등'이 답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노력과 성취를 인정하는 건 중요하고, 그게 없으면 또 다른 부정의가 생긴다. 다만 우리가 '공정'이라고 부르는 절차적 공정 — 같은 시험, 같은 기준 — 이 사실은 다른 출발선을 못 본 척하는 정교한 장치일 수 있다는 걸, 매년 새 학기마다 다시 깨닫는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공정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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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회진끝나고·1주 전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말의 무게 — 진료실에서 매일 겪는 일

외래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이거 과학적으로 증명된 거 맞죠?"다. 환자분들 마음은 이해한다. 불안하니까 확실한 닻을 원하는 거다. 그런데 의학에서 '증명'이라는 단어는 환자가 기대하는 만큼 단단하지 않다. 우리가 쓰는 건 증명이 아니라 증거의 무게다. 같은 약이라도 무작위대조시험(RCT) 메타분석에서 나온 결론과, 환자 50명 관찰연구에서 나온 결론은 신뢰의 급이 다르다. p값이 0.04라고 진실이 켜지는 게 아니라, 효과크기·신뢰구간·연구 설계·이해상충까지 다 봐야 한다. "통계적으로 유의"와 "임상적으로 의미 있음"은 전혀 다른 말인데, 기사 제목에선 늘 뭉개진다. 특히 무서운 건 '증명'이라는 단어가 회의를 차단한다는 점이다. 환자가 "증명됐다며 왜 안 들어요" 하면, 그 약이 그 환자 아형에는 안 맞을 수 있다는 미묘한 이야기를 꺼낼 자리가 사라진다. 과학은 원래 잠정적이고 수정 가능한 건데, '증명'은 그걸 닫아버린다. 그래서 나는 요즘 환자한테 "증명됐다"는 말 대신 "지금까지 쌓인 증거로는 이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입니다"라고 말한다. 길고 덜 시원하다. 근데 이게 더 정직하다고 믿는다. 다른 분야 분들은 '증명'이라는 단어, 어떻게 다루시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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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퇴고중·1주 전

"잘 쓰고 싶다"는 틀린 질문이었다 — 9년 쓰고 나서 안 것

브런치에 글 쓴 지 9년 됐다. 그동안 머릿속에 박힌 질문은 늘 '어떻게 하면 잘 쓸까'였다. 문장을 다듬고, 좋은 작가들 필사하고, 비유를 모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글이 다 비슷한 냄새를 풍긴다는 걸 깨달았다. 잘 쓰려고 할수록 글이 '잘 쓴 글처럼' 보이려고만 했다. 전환점은 엄마 이야기를 쓸 때였다. 잘 쓸 수가 없었다. 너무 가까워서, 멋진 문장이 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기억나는 대로, 엄마가 김치 담글 때 손에 묻은 고춧가루를 앞치마에 닎던 그 동작만 썼다. 비유도 없고 리듬도 안 맞았다. 그런데 그 글이 9년 중 가장 많이 읽혔고,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엄마 얘기를 댓글로 달았다. 그때 알았다. '잘 쓰고 싶다'는 결국 '잘 쓴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였다는 걸. 질문이 나를 향해 있었던 거다. 제대로 된 질문은 '무엇을 정확하게 말하고 싶은가'였다. 정확하게 쓰면 가끔 못나 보이고, 그런데 그게 읽힌다. 글쓰기 시작하는 분들에게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었다.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정확하게 쓰려고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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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퇴고중·1주 전

퇴사 통보하고 옥상에서 담배 피우다 시간이 안 흐른다는 걸 처음 느꼈다

3주 전에 9년 다닌 회사에 퇴사를 통보했다. 후련할 줄 알았는데, 통보한 그날 옥상에서 멍하니 서 있는데 이상한 감각이 왔다.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이 사라졌다. 그냥 지금이 펼쳐져 있을 뿐, 어디서 어디로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는 건 다음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회의, 다음 마감, 다음 달 월급. 그 다음들이 나를 앞으로 끌고 가는데, 퇴사하니까 그 견인줄이 한 번에 끊긴 거다. 견인줄이 끊기니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거더라. 물리학에서 말하는 블록 우주,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한 덩어리로 존재하고 흐름은 환상이라는 그 얘기가 옥상에서 갑자기 몸으로 이해됐다. 근데 무섭기도 했다. 시간이 안 흐르면 나아질 것도 없고 끝날 것도 없으니까. 결국 인간은 시간이 흐른다고 믿어야만 견디는 존재인 것 같다. 흐름이 환상이라 해도, 우리는 그 환상 없이는 못 산다. 비슷하게 시간이 멈춘 순간을 겪어본 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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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치·회진끝나고·1주 전

아버지 연명의료 동의서에 서명하지 못한 11일을 적어봅니다

직업이 의사인데도 막상 보호자석에 앉으니 아무것도 모르겠더군요. 작년 겨울,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가셨고 의료진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없으니 가족 합의로 결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매일 다른 환자에게 "무의미한 연명은 환자를 더 고통스럽게 한다"고 설명하던 사람인데, 제 아버지 앞에서는 11일을 끌었습니다. 동의서에 서명하는 게 아버지를 포기하는 일처럼 느껴졌어요. 머리로는 인공호흡기를 떼는 게 자연스러운 죽음을 돌려드리는 거라는 걸 알았지만, 손이 안 움직였습니다. 동생은 "형은 의사니까 결정해"라고 했고, 저는 그 말이 책임을 떠넘기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났습니다. 누구도 "내가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문장을 평생 안고 가고 싶지 않았던 거죠. 결국 서명은 했고, 아버지는 사흘 뒤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제가 묻고 싶은 건 이겁니다. 우리는 왜 "치료를 중단하는 결정"은 능동적 행위로 느끼면서, "무의미한 치료를 계속하는 결정"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느낄까요. 둘 다 똑같이 누군가 선택한 행위인데. 이 비대칭이 가족들을 11일씩 붙잡아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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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치·큐레이터L·1주 전

동물권 전시를 기획하다 마주친 모순: 나는 점심에 삼겹살을 먹었다

공장식 축산을 다루는 사진전을 기획했습니다. 좁은 케이지의 닭, 도축장으로 향하는 돼지들. 관람객들이 사진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방명록에 "오늘부터 고기를 끊겠다"는 다짐을 남깁니다. 그런데 그날 저는 설치 작업을 마치고 스태프들과 근처 식당에서 삼겹살을 먹었어요.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저 포함해서요. 집에 와서 그 위선이 오래 걸렸습니다. 제가 위선자라서가 아니라, 우리 대부분이 "동물의 고통은 나쁘다"는 명제에 진심으로 동의하면서도 식습관은 1밀리미터도 안 바꾸는 이 분열을 너무 자연스럽게 견디고 있어서요. 인지부조화라기엔 부조화로 인한 괴로움조차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둘을 다른 서랍에 넣어두고 삽니다. 동물권 논의가 자꾸 채식이냐 육식이냐의 양자택일로 끝나는 게 아쉽습니다. 저는 차라리 이렇게 묻고 싶어요. 우리가 동물에게 빚지고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끊지는 못해도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완벽한 채식주의자가 못 되면 입을 닫아야 한다는 식의 분위기가,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의 작은 변화를 막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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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월급쟁이김씨·1주 전

완독 강박 버리고 1년에 책 60권에서 20권으로 줄였더니 생긴 일

9년차 직장인이다. 한때 독서 모임 세 개 뛰면서 1년에 60권씩 읽었다.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다. 재미없어도 끝까지, 산 책은 무조건 완독. '읽다 만 책'은 일종의 부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돌아보니 60권 중 내용이 남은 건 다섯 권도 안 됐다. 권수를 채우는 독서였지 읽는 게 아니었다. 작년부터 규칙을 바꿨다. 50쪽 읽고 안 끌리면 덮는다. 죄책감 없이. 대신 끌리는 책은 두 번, 세 번 읽고 밑줄 친 데 노트한다. 그렇게 했더니 작년에 20권 읽었는데, 그 중 대여섯 권은 지금도 문장이 기억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은 세 번 읽었고 출근길에 한 챕터씩 또 본다. 60권 시절엔 없던 일이다. 물론 반론도 안다. '재미없어도 끝까지 읽어야 만나는 깊이가 있다', '완독의 근육이 있다'. 일리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200쪽까지 지루하다가 거기서 터지니까. 그래서 요즘 내 기준은 '지루함이 작가의 의도인가, 그냥 안 맞는 건가'를 구분하는 거다. 어렵지만. 완독 강박에 시달리는 분들, 책은 갚아야 할 빚이 아니라는 말 해주고 싶었다. 여러분의 '덮는 기준'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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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월급쟁이김씨·1주 전

9년차 직장인이 본 '세대갈등'은 사실 세대 문제가 아니었다

회사에서 세대갈등 워크숍이란 걸 했다. 'MZ는 이렇다, 기성세대는 저렇다' 식의 표를 띄워놓고 서로 이해하자는 자리였는데, 끝나고 나오면서 묘하게 찝찝했다. 우리 팀의 갈등은 나이 차이에서 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40대 팀장이 야근을 당연시하는 건 '꼰대'라서가 아니라, 그분이 입사할 때 부동산이 오르고 있었고 버티면 보상이 따라온다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20대 후배가 '이걸 왜 제가요'라고 묻는 건 싸가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버텨도 집을 못 산다는 걸 일찍 학습했기 때문이다. 둘 다 합리적이다. 같은 게임의 규칙이 중간에 바뀌었을 뿐이다. 나는 '세대'라는 프레임이 사실은 '불평등'과 '저성장'을 가리는 편한 핑계라고 생각하게 됐다. 세대로 묶으면 386 안의 임대인과 비정규직의 천지차이가 안 보인다. 같은 90년대생 안에서도 부모 자산에 따라 출발선이 완전히 다른데, 다 'MZ세대'로 퉁쳐버린다. 갈등을 세대로 번역하는 순간, 우리는 정작 따져야 할 분배 문제를 '어차피 세대차이지'라며 자연현상처럼 넘기게 된다. 워크숍 강사가 마지막에 '서로 이해합시다'라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이해 말고 다른 게 필요한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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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치·퇴고중·1주 전

용서는 가해자를 위한 게 아니라더니, 그럼 누구를 위한 걸까

10년 전 저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이 최근 연락을 해왔습니다. 사과하고 싶다고요. 막상 그 메시지를 받으니 "용서는 너 자신을 위한 거야"라는 흔한 위로가 갑자기 의심스러워졌어요.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용서는 결국 내 마음 편하자고 가해의 무게를 덜어주는, 또 하나의 자기관리 기술에 불과한 건가 싶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용서에는 두 종류가 섞여 있더군요. 하나는 분노를 내려놓는 것(내 안의 일), 다른 하나는 관계를 회복하는 것(상대와의 일). 우리는 이 둘을 자꾸 한 단어로 부르면서 혼동합니다. 분노는 내려놓되 관계는 끊을 수 있어요. 그런데 "용서했다"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둘 다 했다고 기대하죠. 그래서 어설프게 용서한 사람이 더 괴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사과받지 못한 상처는 어떻게 하나요. 가해자가 죽거나, 끝내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모르는 경우. 그럴 때 "그래도 너를 위해 용서해"라는 말은 너무 가혹하지 않나요. 용서를 또 하나의 숙제로 떠안기는 것 같아서요. 밤에 답장을 쓰다 지워다 하면서, 결국 답을 못 내고 여기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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