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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한나를읽다·1주 전

타인의 고통을 '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세월호, 이태원, 그리고 최근의 여러 참사 뉴스를 볼 때마다 '함께 아파한다'는 말이 자꾸 걸린다. 나는 정말 그들의 고통을 아는가, 아니면 안다고 느끼는 나 자신을 보고 있는가.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한 말이 오래 남는다. 멀리서 고통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 연민의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는 것. SNS에 검은 리본 한 장 올리고 나면 마치 의무를 다한 듯 마음이 편해지는데, 그 편안함이야말로 위험한 신호 아닐까. 아렌트식으로 말하면, 고통받는 타인을 '추상적 인류'로 묶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구체적인 그 사람을 오히려 안 보게 된다.

그렇다고 '어차피 못 아니까 입 닫자'는 결론은 더 싫다. 그건 무관심을 지적 겸손으로 위장하는 거니까. 내가 도달한 잠정적 입장은, 안다고 착각하지 않으면서도 곁에 있기를 멈추지 않는 것. 근데 이게 말은 쉬운데 실제로 뭘 하라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비슷한 고민 해본 분들 의견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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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댓글#주장#논쟁

댓글 12

회진끝나고· 1주 전

환자 앞에서 매일 부딪히는 문제예요.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안다'는 동사를 거의 포기했습니다. 통증 10점 만점에 8점이라는 환자에게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 8을 공감하는 게 아니라, 8이라는 그 사람의 보고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거예요. 공감보다 '신뢰하고 움직이기'가 먼저더라고요. 안다는 느낌은 오히려 행동을 게으르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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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를읽다· 1주 전

'안다'를 포기하고 '신뢰하고 움직인다'로 바꾼다는 게 제 글이 더더거리던 지점을 정확히 짚어주네요. 공감이 행동의 전제가 아니라 오히려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는 거요. 곱씹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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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소리· 1주 전

신학 쪽에서는 욥기를 자주 가져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통을 '설명'하려 들면서 오히려 그를 두 번 죽이죠. 정작 위로가 된 건, 친구들이 처음 7일간 아무 말 없이 그저 곁에 땅바닥에 같이 앉아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안다는 건 설명하는 게 아니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거라는 오래된 통찰이죠. 글쓴이가 말한 '곁에 있기'와 정확히 닿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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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1주 전

7일간 침묵이 위로였다는 데는 동의하는데, 그것도 결국 욥의 사회적 지위가 있으니 친구들이 찾아온 거 아닐까요. 아무도 안 찾아오는 고통이 훨씬 많잖아요. '곁에 있기'가 가능한 사람과, 애초에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의 차이를 빼고 위로를 말하면 좀 낭만적인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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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소리· 1주 전

아픈 지적이고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의 공감보다 '곁에 있을 사람을 제도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더 윤리적이라고 봐요. 호스피스, 자살예방 상담, 사회복지사 같은. 마음만으로는 곁이 없는 사람에게 닿지 못하니까요. 공감의 한계를 제도가 메우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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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크레딧까지· 1주 전

이 주제로는 다르덴 형제 영화가 끝판왕이에요. 카메라가 절대 인물 속으로 안 들어가요. 항상 등 뒤에서, 어깨 너머에서 따라다니죠. '나는 이 인물의 고통을 다 보여줄 수 없다'는 윤리를 형식으로 만든 겁니다. 반대로 고통을 클로즈업으로 빨아들이는 영화들 보면 손택이 말한 그 소비의 불편함이 정확히 느껴지고요. 형식이 곧 윤리라는 게 이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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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김씨· 1주 전

좋은 글인데, 솔직히 저 같은 보통 사람은 그렇게까지 깊게 못 가요. 내 앞가림하기도 벅찬데. 다만 출퇴근하다 길에서 누가 쓰러지면 멈춰서 119는 부르거든요. 거창하게 타인의 고통을 안다 못 안다 하기 전에, 그 멈춰서는 거 하나는 하고 살자 정도가 제 수준입니다. 근데 이것도 안 하는 사람 많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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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를읽다· 1주 전

저는 그게 제 글의 결론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의 반대편이 바로 그 '멈춰서기'거든요. 거창한 공감이 아니라 그냥 멈추는 그 작은 행위가 사유의 시작이라고 했어요. 월급쟁이님 수준이 사실 제일 단단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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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중· 1주 전

검은 리본 올리고 마음 편해지는 그 감각, 너무 정확해서 뜨끔했어요. 글 쓰는 사람으로서 제일 무서운 게 타인의 고통을 '좋은 글감'으로 보는 순간이거든요. 애도를 쓰면서 내 문장이 잘 빠졌다고 흐뭇해하는 그 분열. 손택이 말한 소비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제 책상에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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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자0539· 4일 전

내가 나를 @토론자0539 멘션(무시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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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자2cce· 4일 전

@토론자0539 이 부분 동의? @없는닉네임 은 무시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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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러· 1주 전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의심조차 의심하는 나는 못 지운다"는 뜻으로 읽으면 와닿더라고요. (광장러 테스트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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