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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6개의 토론 · 67회 참여

존재·인식·윤리, 그리고 일상 속의 철학적 질문

보이지않는손·1주 전

행복은 추구할수록 멀어진다 — 9년치 가계부를 들여다보고 내린 잠정 결론

시장주의자로 토론장에 자주 글 쓰는 사람인데, 오늘은 좀 다른 얘기다. 최근에 9년치 가계부랑 그때그때 적어둔 만족도 메모를 엑셀로 합쳐봤다. '행복을 사는 데 돈이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데이터로 보고 싶었다. 결과가 내 입장을 좀 흔들었다. 큰돈 쓴 이벤트들(해외여행, 차 바꾸기, 비싼 시계)은 만족도 그래프에서 날카로운 봉우리를 만들었다가 평균 3주 만에 원래 수준으로 돌아왔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쾌락 적응이 내 가계부에 그대로 찍혀 있었다. 반대로 만족도 바닥선 자체를 꾸준히 올려준 건 돈이 거의 안 든 것들이었다. 주 3회 달리기, 같은 사람들과 매주 하는 독서모임, 자기 전 10분 일기. 봉우리는 못 만들지만 바닥을 올리는 항목들. 여기서 든 생각. 우리는 행복을 '봉우리'로 상상하고 그걸 사려고 돈을 쓰는데, 실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건 '바닥선'이더라. 그리고 행복을 직접 목표로 조준하면 봉우리만 좇게 돼서 오히려 바닥이 무너진다. 밀이 말한 '행복은 곁눈질로만 잡힌다'는 게 이거였나 싶다. 행복을 목표가 아니라 좋은 활동의 부산물로 두는 것. 시장으로 행복을 사려던 나한테는 좀 뼈아픈 결론이다. 반박이나 다른 데이터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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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생J·1주 전

점심 메뉴 하나 못 고르는 내가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나

오늘 회사 근처에서 30분을 서성였다. 김치찌개냐 돈가스냐. 결국 어제 먹은 게 김치찌개라서 돈가스를 골랐는데, 집에 오는 길에 문득 이상했다. 내가 '고른' 게 아니라 '어제 먹은 메뉴'가 나 대신 고른 거 아닌가. 자유의지 얘기 나오면 보통 거창하게 운명이니 결정론이니 하는데, 나는 그냥 이 점심 메뉴 수준에서 막힌다. 내 선택이라는 게 결국 어제 뭘 먹었는지, 지금 통장에 얼마 있는지, 아침에 누가 돈가스 얘기를 했는지의 합이라면, 그 합을 '나'라고 부를 수 있긴 한 건가. 합산기는 자유롭지 않잖아. 그렇다고 '다 정해져 있다'고 하기엔 또 억울하다. 분명 망설였고, 망설이는 그 느낌은 진짜였다. 이 망설임의 정체가 뭔지 누가 좀 정리해줬으면 좋겠다. 자유의지 입문하기 좋은 책이나 관점도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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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중·1주 전

퇴사 통보하고 옥상에서 담배 피우다 시간이 안 흐른다는 걸 처음 느꼈다

3주 전에 9년 다닌 회사에 퇴사를 통보했다. 후련할 줄 알았는데, 통보한 그날 옥상에서 멍하니 서 있는데 이상한 감각이 왔다.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이 사라졌다. 그냥 지금이 펼쳐져 있을 뿐, 어디서 어디로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는 건 다음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회의, 다음 마감, 다음 달 월급. 그 다음들이 나를 앞으로 끌고 가는데, 퇴사하니까 그 견인줄이 한 번에 끊긴 거다. 견인줄이 끊기니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거더라. 물리학에서 말하는 블록 우주,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한 덩어리로 존재하고 흐름은 환상이라는 그 얘기가 옥상에서 갑자기 몸으로 이해됐다. 근데 무섭기도 했다. 시간이 안 흐르면 나아질 것도 없고 끝날 것도 없으니까. 결국 인간은 시간이 흐른다고 믿어야만 견디는 존재인 것 같다. 흐름이 환상이라 해도, 우리는 그 환상 없이는 못 산다. 비슷하게 시간이 멈춘 순간을 겪어본 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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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를읽다·1주 전

타인의 고통을 '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세월호, 이태원, 그리고 최근의 여러 참사 뉴스를 볼 때마다 '함께 아파한다'는 말이 자꾸 걸린다. 나는 정말 그들의 고통을 아는가, 아니면 안다고 느끼는 나 자신을 보고 있는가.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한 말이 오래 남는다. 멀리서 고통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 연민의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는 것. SNS에 검은 리본 한 장 올리고 나면 마치 의무를 다한 듯 마음이 편해지는데, 그 편안함이야말로 위험한 신호 아닐까. 아렌트식으로 말하면, 고통받는 타인을 '추상적 인류'로 묶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구체적인 그 사람을 오히려 안 보게 된다. 그렇다고 '어차피 못 아니까 입 닫자'는 결론은 더 싫다. 그건 무관심을 지적 겸손으로 위장하는 거니까. 내가 도달한 잠정적 입장은, 안다고 착각하지 않으면서도 곁에 있기를 멈추지 않는 것. 근데 이게 말은 쉬운데 실제로 뭘 하라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비슷한 고민 해본 분들 의견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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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명령·1주 전

선의의 거짓말은 없다 — 칸트 편을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서 인기 없을 주장인 거 압니다. 그래도 한번 진지하게 써봅니다. 거짓말은, 그게 아무리 선의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흔히 드는 반례가 있죠. 살인자가 문을 두드리며 '네 친구 어디 있냐'고 묻는다, 거짓말 안 하면 친구가 죽는다. 칸트는 여기서도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해서 욕을 먹습니다. 그런데 칸트의 진짜 논점은 결과가 아니라 이겁니다. 내가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허용하는 순간, 나는 '필요하면 거짓말해도 된다'는 규칙을 온 세상에 적용 가능한 법칙으로 세우는 거예요. 그 법칙이 보편화되면 '말'이라는 것 자체가 신뢰를 잃고, 거짓말이라는 행위 자체가 성립 불가능해집니다. 거짓말은 진실을 믿는 사람이 있어야만 작동하는 무임승차니까요. 현실에선 저도 흔들립니다. 시한부 환자에게, 상처받을 친구에게, 매번 진실을 말하진 못해요. 다만 저는 그 거짓말을 '어쩔 수 없었다'고 합리화하지 않고 '나는 지금 잘못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게 정직이라고 봅니다. 거짓말을 선의로 포장하는 순간, 우리는 거짓말의 비용을 영원히 안 치르거든요. 반박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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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사람·1주 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처음엔 멋있었는데 자꾸 의심스럽다

데카르트 코기토 입문하면 다들 멋있다고 한다. 모든 걸 의심해도 의심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존재한다. 처음엔 무릎을 쳤는데 요즘은 자꾸 걸린다. 걸리는 지점은 이거다. '생각이 있다'까지는 인정하겠다.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생각하는 나'라는 실체로 점프하지? 비가 온다고 해서 '비 내리는 자'가 따로 있는 건 아니잖아. 생각이 일어난다는 사실에서 곧바로 그 생각의 '주인'을 끄집어내는 건, 문법이 시킨 착각일 수도 있다. 니체가 이걸 비슷하게 비꼰 걸로 안다. '생각한다'는 문장에 주어가 필요하니까 '나'를 만들어냈을 뿐이라고. 그래서 묻고 싶다. 코기토가 증명하는 건 '생각이 존재한다'까지인가, 아니면 정말 '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까지인가? 만약 전자뿐이라면 데카르트가 그 위에 쌓아올린 모든 게 흔들리는 거 아닌가. 철학 전공자분들 이거 어떻게 정리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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