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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질문하는교실·1주 전

교실에서 본 '능력주의'의 균열 — 우리는 무엇을 공정이라 부르나

중학교에서 13년째 아이들을 가르친다.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한다. 마이클 샌델의 책이 유행했을 때 동료들과 읽었는데, 교실에서 매일 마주하는 현실이라 책보다 아이들이 더 많이 가르쳐줬다.

한 반에 이런 두 아이가 있다고 하자. A는 부모가 매일 학습을 봐주고 학원 세 곳을 다니며 90점을 받는다. B는 부모가 맞벌이로 새벽에 나가고, 혼자 동생을 챙기며 75점을 받는다. 우리 평가 시스템은 A를 '우수', B를 '보통'으로 분류한다. 그런데 나는 B가 자기 조건에서 끌어올린 75점이 A의 90점보다 더 큰 성취라는 걸 안다. 문제는 어떤 평가도 그걸 기록하지 못한다는 거다.

능력주의의 잔인함은 '실패는 네 탓'이라는 메시지를 패배자에게 내면화시키는 데 있다고 샌델은 말했다. 교실에서 이건 추상이 아니다. B가 고등학교, 대학, 취업으로 가면서 '나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을 나는 몇 번이고 지켜봤다. 출발선이 달랐다는 사실은 어느 순간 본인의 기억에서도 지워진다.

그렇다고 '결과의 평등'이 답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노력과 성취를 인정하는 건 중요하고, 그게 없으면 또 다른 부정의가 생긴다. 다만 우리가 '공정'이라고 부르는 절차적 공정 — 같은 시험, 같은 기준 — 이 사실은 다른 출발선을 못 본 척하는 정교한 장치일 수 있다는 걸, 매년 새 학기마다 다시 깨닫는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공정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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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댓글#경험#장문

댓글 8

정언명령· 1주 전

깊이 동의하면서도 한 가지 구분을 보태고 싶습니다. B의 75점이 '더 큰 성취'라는 건 도덕적 평가이고, A의 90점이 '더 높은 실력'이라는 건 사실 평가입니다. 둘은 다른 차원이에요. 위험한 건 이 둘을 뒤섞을 때입니다. 의대 입시에서 '역경을 이겨낸 노력'만으로 뽑을 수 없는 이유가 거기 있죠. 공정은 이 두 차원을 어떻게 분리하고 또 어떻게 함께 고려하느냐의 문제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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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교실· 1주 전

정확한 지적입니다. 사실 교사로서 가장 어려운 게 그 지점이에요. B의 분투에 감동하는 것과, B에게 의사 자격을 주는 건 다른 판단이죠. 제 글이 둘을 살짝 뭉갰네요. 다만 현재 시스템이 '사실 평가'만 기록하고 '맥락'은 통째로 버린다는 게 제 문제의식입니다. 두 차원을 분리하자는 말씀이 오히려 제 주장을 더 정밀하게 만들어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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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1주 전

샌델 비판이 유행하면서 능력주의가 무슨 만악의 근원처럼 됐는데, 솔직히 좀 과합니다. 능력주의의 대안이 뭔가요? 연줄? 신분? 추첨? 인류가 만든 분배 원칙 중에 그나마 가장 덜 나쁜 게 능력주의입니다. '출발선이 다르다'는 비판은 맞지만, 그건 능력주의를 폐기할 이유가 아니라 출발선을 보정할 이유죠. 목욕물 버리다 아이까지 버리는 논의가 너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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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교실· 1주 전

이 반론 환영합니다. 그리고 동의해요. 저도 능력주의를 폐기하자는 게 아니라, '능력만 본다'는 그 순수성이 거짓이라는 걸 짚은 겁니다. 출발선 보정 없는 능력주의는 그냥 세습의 세탁이 되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아이는 안 버리되 목욕물은 갈자는 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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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진끝나고· 1주 전

능력주의가 '가장 덜 나쁜' 원칙이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의료 현장에서 보면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능력주의를 완벽히 내면화한 사람일수록 번아웃과 자기혐오가 심해요. '여기까지 온 건 다 내 능력'이라는 서사가 무너지는 순간을 버티질 못합니다. 원칙으로서의 능력주의와, 인간을 갉아먹는 능력주의 '윤리'는 좀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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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생J· 1주 전

B가 '나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는 부분에서 멈칫했어요. 제가 딱 그랬거든요. 지방에서 올라와서 적응 못 한 걸 다 제 탓으로 돌렸던 시절이 있었는데, 출발선 얘기를 들으니 좀 숨이 쉬어지네요. 근데 한편으론 이게 또 다른 '핑계'가 되면 어쩌지 하는 무서움도 같이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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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소리· 1주 전

그 '무서움'이 오히려 건강한 신호 같습니다. 구조를 핑계로 삼는 사람은 보통 그런 두려움이 없거든요. 구조도 보고 내 몫도 보는 긴장을 견디는 것, 그 자리에 있는 분이 J님인 것 같아요. 둘 중 하나로 도망치지 않는 게 가장 어렵고 또 가장 정직한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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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중· 1주 전

B의 75점을 기록할 칸이 평가표에 없다는 문장이 오래 남네요. 사회가 사람을 숫자로 번역할 때 늘 버려지는 여백이 있죠. 좋은 서사는 바로 그 여백을 복원하는 일인데, 행정과 통계는 정반대로 작동하니까요. 선생님이 그 아이들의 75점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작은 저항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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