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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치·회진끝나고·1주 전

아버지 연명의료 동의서에 서명하지 못한 11일을 적어봅니다

직업이 의사인데도 막상 보호자석에 앉으니 아무것도 모르겠더군요. 작년 겨울,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가셨고 의료진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없으니 가족 합의로 결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매일 다른 환자에게 "무의미한 연명은 환자를 더 고통스럽게 한다"고 설명하던 사람인데, 제 아버지 앞에서는 11일을 끌었습니다.

동의서에 서명하는 게 아버지를 포기하는 일처럼 느껴졌어요. 머리로는 인공호흡기를 떼는 게 자연스러운 죽음을 돌려드리는 거라는 걸 알았지만, 손이 안 움직였습니다. 동생은 "형은 의사니까 결정해"라고 했고, 저는 그 말이 책임을 떠넘기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났습니다. 누구도 "내가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문장을 평생 안고 가고 싶지 않았던 거죠.

결국 서명은 했고, 아버지는 사흘 뒤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제가 묻고 싶은 건 이겁니다. 우리는 왜 "치료를 중단하는 결정"은 능동적 행위로 느끼면서, "무의미한 치료를 계속하는 결정"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느낄까요. 둘 다 똑같이 누군가 선택한 행위인데. 이 비대칭이 가족들을 11일씩 붙잡아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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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댓글#경험#장문

댓글 9

광야의소리· 1주 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비대칭, 신학에서는 오래된 작위/부작위 구분 문제죠. 그런데 현장에서 보면 그 구분이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나는 죽인 게 아니라 붙잡지 않았을 뿐"이라는 문장이 있어야 버티는 분들이 계세요. 철학적으로 틀린 위안이라도, 사람을 살리는 위안은 함부로 못 빼앗겠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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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명령· 1주 전

위안이 된다는 것과 그 구분이 옳다는 것은 다른 문제 아닐까요. 결정의 무게를 직시하지 않으려고 만든 언어라면, 그건 본문 글쓴이가 11일을 끈 바로 그 자기기만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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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진끝나고· 1주 전

두 분 말씀이 다 제 안에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붙잡지 않았을 뿐"이라는 문장으로 버텼고, 동시에 그게 비겁하다는 걸 알았어요. 다만 정언명령님, 직시한다고 11일이 3일로 줄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무게를 다 느끼면서도 결국 똑같이 오래 걸렸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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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사람· 1주 전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만약 아버지께서 의식이 또렷하실 때 "나는 호흡기 떼지 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면, 그래도 11일을 고민하셨을까요. 아니면 그 비대칭의 진짜 정체는 "아버지의 뜻을 모른다"는 불확실성 쪽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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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진끝나고· 1주 전

정곡입니다. 아버지가 명확히 말씀하셨다면 저는 죄책감의 대상이 "내 선택"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지키는 일"로 바뀌었을 거예요. 그게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진짜 기능 같습니다. 죽음을 막는 게 아니라, 남은 사람을 결정의 형벌에서 풀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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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김씨· 1주 전

저희 어머니 때가 떠올라서 한참 못 읽고 있었습니다. 저는 의사도 아니고 그냥 회사원이라 의료진 설명을 절반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런 상태에서 결정하라니까 더 무서웠습니다. 글쓴이님은 적어도 뭘 결정하는지 아셨잖아요. 모르는 채로 서명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거, 이 제도가 좀 더 신경 써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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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1주 전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결국 이 11일 동안 들어간 중환자실 비용과 병상은 누군가 부담합니다. 가족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시간을 사회가 비용으로 떠안는 구조가 과연 지속 가능한가요. 감정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이 논의가 늘 개인의 마음에서만 끝나는 게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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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진끝나고· 1주 전

그 질문 자체는 정당합니다. 다만 순서가 문제예요. 비용 이야기를 슬픔의 한복판에 있는 가족 앞에서 꺼내면, 그 사람은 평생 "내가 돈 때문에 아버지를 포기했나"를 의심하게 됩니다. 제도 설계의 영역에서 다뤄야 할 걸 개인의 양심으로 떠넘기면 안 된다는 점에선 저도 같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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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를읽다· 1주 전

비용 논의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인간을 비용으로 환산하는 언어가 언제 어디서 등장하느냐가 그 사회의 품격을 정합니다. 회의주의도 자리를 가려야 회의주의로서 힘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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