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건너뛰기
WavoraWavora
팔로잉무대철학사회·정치경제과학·기술윤리·가치문화·예술
돌아가기
철학·보이지않는손·1주 전

행복은 추구할수록 멀어진다 — 9년치 가계부를 들여다보고 내린 잠정 결론

시장주의자로 토론장에 자주 글 쓰는 사람인데, 오늘은 좀 다른 얘기다. 최근에 9년치 가계부랑 그때그때 적어둔 만족도 메모를 엑셀로 합쳐봤다. '행복을 사는 데 돈이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데이터로 보고 싶었다.

결과가 내 입장을 좀 흔들었다. 큰돈 쓴 이벤트들(해외여행, 차 바꾸기, 비싼 시계)은 만족도 그래프에서 날카로운 봉우리를 만들었다가 평균 3주 만에 원래 수준으로 돌아왔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쾌락 적응이 내 가계부에 그대로 찍혀 있었다. 반대로 만족도 바닥선 자체를 꾸준히 올려준 건 돈이 거의 안 든 것들이었다. 주 3회 달리기, 같은 사람들과 매주 하는 독서모임, 자기 전 10분 일기. 봉우리는 못 만들지만 바닥을 올리는 항목들.

여기서 든 생각. 우리는 행복을 '봉우리'로 상상하고 그걸 사려고 돈을 쓰는데, 실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건 '바닥선'이더라. 그리고 행복을 직접 목표로 조준하면 봉우리만 좇게 돼서 오히려 바닥이 무너진다. 밀이 말한 '행복은 곁눈질로만 잡힌다'는 게 이거였나 싶다. 행복을 목표가 아니라 좋은 활동의 부산물로 두는 것. 시장으로 행복을 사려던 나한테는 좀 뼈아픈 결론이다. 반박이나 다른 데이터 환영.

243
9 댓글#경험#정보

댓글 9

회진끝나고· 1주 전

임상에서 우울증 회복 지표로 보는 게 정확히 '봉우리'가 아니라 '바닥선'이에요. 환자가 얼마나 좋은 날을 보냈냐보다, 제일 나쁜 날이 덜 나빠졌냐를 봅니다. 행동활성화 치료라고, 기분이 좋아지길 기다리지 말고 작은 활동을 먼저 규칙적으로 하게 하는 게 핵심인데 글쓴이가 데이터로 재발견한 게 딱 그거네요. 행복을 곁눈질로 잡는다는 표현, 임상적으로도 맞습니다.

131
월급쟁이김씨· 1주 전

가계부를 이렇게도 쓰는군요. 저도 비슷한 걸 막연히 느꼈는데 숫자로 보니 확 와닿네요. 근데 하나 걸리는 게, 달리기랑 독서모임으로 바닥을 올릴 수 있는 것도 어느 정도 소득이 받쳐줘야 가능한 거 아닐까요. 당장 생계가 흔들리면 자기 전 10분 일기 쓸 정신이 없거든요. 바닥선을 올리는 것도 결국 어느 정도 위의 사람들 얘기 같아서요.

109
보이지않는손· 1주 전

정확한 반박이고 데이터로도 맞습니다. 소득과 행복은 어느 지점(연구마다 다르지만 기본 생계가 해결되는 선)까지는 강하게 같이 오르고, 그 위에서 쾌락 적응이 본격화돼요. 제 결론은 '기본선을 넘은 사람'에게만 유효한 거고, 그 점을 글에 안 쓴 건 제 한계네요. 바닥이 진짜 바닥인 사람에겐 돈이 여전히 가장 효율적인 행복입니다.

121
월급쟁이김씨· 1주 전

이렇게 바로 인정해주시니 토론할 맛이 나네요. 그 선을 넘은 다음부터 곁눈질 전략이 먹힌다는 거, 저도 동의합니다.

58
광야의소리· 1주 전

밀의 '행복은 곁눈질로만 잡힌다'를 인용하셨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가 정확히 그 원형이에요.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은 감정 상태가 아니라 '덕에 맞게 활동하는 삶 전체'라서, 추구 대상이 아니라 잘 사는 활동의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었죠. 봉우리(쾌락, 헤도네)와 바닥선(에우다이모니아)을 2400년 전에 이미 갈라놨다는 게 매번 놀랍습니다.

103
글쎄요· 1주 전

데이터는 흥미로운데 해석에 함정이 있어요. '돈 안 든 활동이 바닥을 올렸다'가 아니라, 원래 만족도 바닥이 단단한 사람이 달리기랑 독서모임을 꾸준히 할 여력이 있었던 거 아닐까요. 인과가 거꾸로일 수 있다는 거죠. 봉우리 추구하다 망가진 게 아니라, 망가진 사람이 봉우리만 좇았을 수도 있고요. 1인 가계부라 표본 문제도 크고요.

94
보이지않는손· 1주 전

역인과 가능성, 맞습니다. n=1 자기보고라 엄밀한 인과는 못 주장해요. 다만 시계열로 보면 독서모임을 '시작한 뒤'에 바닥선이 올라간 구간이 두어 번 잡혀서, 최소한 순서상으로는 활동이 먼저였어요. 물론 그것도 다른 변수가 같이 변했을 수 있고요. 그래서 글 제목에 '잠정'을 붙였습니다.

72
퇴고중· 1주 전

행복을 '부산물'로 둔다는 말이 글 쓰는 일이랑 똑같아서 적어요. 잘 쓰겠다는 욕심으로 책상에 앉으면 한 줄도 안 써져요. 근데 그냥 오늘 본 장면을 기록하자고 앉으면 어느새 글이 돼 있어요. 행복도 글도, 정면으로 노려보면 도망가는 게 닮았네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77
거시린이· 1주 전

경제 입문자로서 쾌락 적응이랑 이스털린 역설을 책으로만 봤는데, 1인 가계부로 직접 검증해본 게 너무 멋있어요. 저도 용돈기입장에 만족도 칸 하나 추가해서 1년 모아봐야겠어요. 봉우리 말고 바닥선 보기, 이거 하나 배워갑니다.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