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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치·퇴고중·1주 전

용서는 가해자를 위한 게 아니라더니, 그럼 누구를 위한 걸까

10년 전 저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이 최근 연락을 해왔습니다. 사과하고 싶다고요. 막상 그 메시지를 받으니 "용서는 너 자신을 위한 거야"라는 흔한 위로가 갑자기 의심스러워졌어요.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용서는 결국 내 마음 편하자고 가해의 무게를 덜어주는, 또 하나의 자기관리 기술에 불과한 건가 싶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용서에는 두 종류가 섞여 있더군요. 하나는 분노를 내려놓는 것(내 안의 일), 다른 하나는 관계를 회복하는 것(상대와의 일). 우리는 이 둘을 자꾸 한 단어로 부르면서 혼동합니다. 분노는 내려놓되 관계는 끊을 수 있어요. 그런데 "용서했다"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둘 다 했다고 기대하죠. 그래서 어설프게 용서한 사람이 더 괴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사과받지 못한 상처는 어떻게 하나요. 가해자가 죽거나, 끝내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모르는 경우. 그럴 때 "그래도 너를 위해 용서해"라는 말은 너무 가혹하지 않나요. 용서를 또 하나의 숙제로 떠안기는 것 같아서요. 밤에 답장을 쓰다 지워다 하면서, 결국 답을 못 내고 여기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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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댓글#경험#질문

댓글 7

광야의소리· 1주 전

신학교에서 가장 많이 오해받는 단어가 용서입니다. 성경의 용서도 사실 "없던 일로 하기"가 아니에요. 빚을 탕감한다는 말의 원뜻은 "빚이 있었음을 인정한 채로 받기를 포기한다"는 거예요. 빚이 없었다고 우기는 게 아니라요. 그래서 진짜 용서는 상처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처를 또렷이 본 사람만 할 수 있어요. 퇴고중님이 둘로 나눈 그 구분, 신학적으로도 정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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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중· 1주 전

"빚이 있었음을 인정한 채로 받기를 포기한다"… 이 문장 때문에 한참 멈췄습니다. 제가 두려웠던 건 용서하면 그 상처가 별것 아니게 되는 거였거든요. 상처를 또렷이 본 채로도 용서가 가능하다면, 답장을 쓸 용기가 조금 생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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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크레딧까지· 1주 전

이창동 감독 밀양이 딱 이 주제죠. 주인공이 아들 죽인 범인을 용서하러 교도소에 갔더니, 범인이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아 평안하다"고 말해요. 자기가 용서할 기회조차 빼앗긴 거죠. 그 장면이 보여주는 건, 용서가 가해자의 평안으로 소비될 때 피해자가 두 번 무너진다는 겁니다. 사과해 온 그분이 정말 글쓴이님을 위한 사과를 하는 건지, 자기 평안을 위한 건지부터 보셔도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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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중· 1주 전

밀양 그 장면 보면서 숨이 막혔던 기억이 나요. 말씀대로, 답장하기 전에 그가 무엇을 위해 사과하는지를 먼저 읽어봐야겠습니다. 제 용서를 그의 면죄부로 내어주지 않으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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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명령· 1주 전

사과받지 못한 상처에 대한 질문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저는 용서를 의무로 떠안기는 건 반대예요. 용서는 권리이지 의무가 아닙니다. "너를 위해 용서해야 한다"는 말은 피해자에게 한 번 더 짐을 지우는 일이에요. 용서하지 않을 자유까지 지켜질 때 비로소 용서가 진짜 가치를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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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사람· 1주 전

되묻고 싶습니다. 가해자가 사과해 온 지금, 글쓴이님이 망설이는 게 정말 "용서할 수 있을까"인가요, 아니면 "사과를 받아주면 그가 너무 쉽게 가벼워지는 게 분하다"인가요. 둘은 전혀 다른 감정이고, 망설임의 정체를 정확히 부르는 것부터가 시작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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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중· 1주 전

아… 후자네요. 인정하기 싫었는데 정확합니다. 제 망설임은 자비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였어요. "내가 10년 아팠는데 너는 메시지 한 통으로 끝?"이라는. 묻는사람님 덕에 제가 뭘 붙들고 있었는지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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