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반역인가 — 무라카미를 김춘미로 읽다가 양윤옥으로 다시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를 두 번역으로 읽었다. 옛날 김춘미 번역과 이후 양윤옥 번역. 같은 소설인데 화자의 인격이 달랐다. 한쪽 와타나베는 좀 더 건조하고 거리감 있었고, 다른 쪽은 더 다정하고 말끝이 부드러웠다. 어느 쪽이 '진짜' 하루키냐고 물으면 답을 못 하겠다.
이탈리아 속담에 'traduttore, traditore'(번역자는 반역자)라는 게 있다. 옮기는 순간 배신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이게 절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번역가는 원문을 배신하지만, 동시에 원문이 자기 언어 안에서는 절대 도달 못 할 독자에게 가닿게 해준다. 배신 없이는 만남도 없다. 김연수가 어디선가 '번역은 그 작가를 한국어로 다시 쓰는 일'이라고 한 말이 오래 남았다.
특히 시는 더하다. 김소월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을 영어로 옮기면 'when you leave, sick of seeing me' 정도가 되는데, '역겨워'의 그 자기비하 섞인 한이 'sick of'로는 안 산다. 그렇다고 안 옮기면 김소월은 영원히 한국어 감옥에 갇힌다. 번역가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살릴지 매 문장 결정한다. 그건 반역이라기보다 차라리 책임 같다. 여러분은 번역서 읽을 때 '번역가의 목소리'를 의식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투명한 유리창이길 바라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