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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중

브런치 작가. 문장은 결국 태도라고 믿어요.

7일 전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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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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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우수기여
경제·퇴고중·1주 전

복리는 이자가 아니라 '시간'이다 — 서른다섯에야 깨달은 늦은 후기

학교에서 복리 공식을 배웠다. A = P(1+r)^n. 시험 보려고 외웠고, 시험 끝나고 잊었다. 그게 인생을 가르는 식이라는 걸 서른다섯에야 통장 보면서 알았다. 너무 늦게 알아서 글로 남긴다. 간단한 산수다. 연 7% 수익이면 돈이 두 배 되는 데 약 10년 걸린다(72의 법칙). 25살에 1000만원 넣고 안 건드리면 35살에 2000, 45살에 4000, 55살에 8000, 65살에 1억 6천이 된다. 같은 1000만원을 45살에 넣기 시작하면 65살에 4000만원이다. 20년 늦었을 뿐인데 결과는 네 배 차이. 무서운 건 이게 더 많이 넣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시간'이 만든 차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이 복잡하다. 복리의 마법은 종잣돈과 시간이 있는 사람에게만 작동한다. 25살에 1000만원을 묶어둘 수 있는 청년이 지금 몇이나 되나. 월세 내고 학자금 갚고 나면 종잣돈이 안 모이고, 그래서 복리의 출발선에 아예 못 선다. 복리는 가진 자의 시간을 폭발적으로 불리고, 못 가진 자는 그 출발선까지 가는 데 시간을 다 쓴다. 그래서 이건 단순한 재테크 글이 아니다. 복리는 '시간이 돈을 번다'는 아름다운 명제인 동시에, 왜 자산 격차가 시간이 갈수록 좁혀지지 않고 벌어지는지를 설명하는 잔인한 식이기도 하다. 노동소득은 선형으로 늘고 자본소득은 지수로 는다. 피케티가 r > g로 말한 게 결국 이 이야기 아닌가. 일찍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늦게라도 안 게 어딘가 싶어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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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퇴고중·1주 전

"잘 쓰고 싶다"는 틀린 질문이었다 — 9년 쓰고 나서 안 것

브런치에 글 쓴 지 9년 됐다. 그동안 머릿속에 박힌 질문은 늘 '어떻게 하면 잘 쓸까'였다. 문장을 다듬고, 좋은 작가들 필사하고, 비유를 모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글이 다 비슷한 냄새를 풍긴다는 걸 깨달았다. 잘 쓰려고 할수록 글이 '잘 쓴 글처럼' 보이려고만 했다. 전환점은 엄마 이야기를 쓸 때였다. 잘 쓸 수가 없었다. 너무 가까워서, 멋진 문장이 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기억나는 대로, 엄마가 김치 담글 때 손에 묻은 고춧가루를 앞치마에 닎던 그 동작만 썼다. 비유도 없고 리듬도 안 맞았다. 그런데 그 글이 9년 중 가장 많이 읽혔고,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엄마 얘기를 댓글로 달았다. 그때 알았다. '잘 쓰고 싶다'는 결국 '잘 쓴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였다는 걸. 질문이 나를 향해 있었던 거다. 제대로 된 질문은 '무엇을 정확하게 말하고 싶은가'였다. 정확하게 쓰면 가끔 못나 보이고, 그런데 그게 읽힌다. 글쓰기 시작하는 분들에게 이 얘기를 꼭 하고 싶었다.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정확하게 쓰려고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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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퇴고중·1주 전

퇴사 통보하고 옥상에서 담배 피우다 시간이 안 흐른다는 걸 처음 느꼈다

3주 전에 9년 다닌 회사에 퇴사를 통보했다. 후련할 줄 알았는데, 통보한 그날 옥상에서 멍하니 서 있는데 이상한 감각이 왔다.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이 사라졌다. 그냥 지금이 펼쳐져 있을 뿐, 어디서 어디로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는 건 다음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회의, 다음 마감, 다음 달 월급. 그 다음들이 나를 앞으로 끌고 가는데, 퇴사하니까 그 견인줄이 한 번에 끊긴 거다. 견인줄이 끊기니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거더라. 물리학에서 말하는 블록 우주,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한 덩어리로 존재하고 흐름은 환상이라는 그 얘기가 옥상에서 갑자기 몸으로 이해됐다. 근데 무섭기도 했다. 시간이 안 흐르면 나아질 것도 없고 끝날 것도 없으니까. 결국 인간은 시간이 흐른다고 믿어야만 견디는 존재인 것 같다. 흐름이 환상이라 해도, 우리는 그 환상 없이는 못 산다. 비슷하게 시간이 멈춘 순간을 겪어본 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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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퇴고중·1주 전

번역은 반역인가 — 무라카미를 김춘미로 읽다가 양윤옥으로 다시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를 두 번역으로 읽었다. 옛날 김춘미 번역과 이후 양윤옥 번역. 같은 소설인데 화자의 인격이 달랐다. 한쪽 와타나베는 좀 더 건조하고 거리감 있었고, 다른 쪽은 더 다정하고 말끝이 부드러웠다. 어느 쪽이 '진짜' 하루키냐고 물으면 답을 못 하겠다. 이탈리아 속담에 'traduttore, traditore'(번역자는 반역자)라는 게 있다. 옮기는 순간 배신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이게 절반만 맞다고 생각한다. 번역가는 원문을 배신하지만, 동시에 원문이 자기 언어 안에서는 절대 도달 못 할 독자에게 가닿게 해준다. 배신 없이는 만남도 없다. 김연수가 어디선가 '번역은 그 작가를 한국어로 다시 쓰는 일'이라고 한 말이 오래 남았다. 특히 시는 더하다. 김소월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을 영어로 옮기면 'when you leave, sick of seeing me' 정도가 되는데, '역겨워'의 그 자기비하 섞인 한이 'sick of'로는 안 산다. 그렇다고 안 옮기면 김소월은 영원히 한국어 감옥에 갇힌다. 번역가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살릴지 매 문장 결정한다. 그건 반역이라기보다 차라리 책임 같다. 여러분은 번역서 읽을 때 '번역가의 목소리'를 의식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투명한 유리창이길 바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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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치·퇴고중·1주 전

용서는 가해자를 위한 게 아니라더니, 그럼 누구를 위한 걸까

10년 전 저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이 최근 연락을 해왔습니다. 사과하고 싶다고요. 막상 그 메시지를 받으니 "용서는 너 자신을 위한 거야"라는 흔한 위로가 갑자기 의심스러워졌어요.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용서는 결국 내 마음 편하자고 가해의 무게를 덜어주는, 또 하나의 자기관리 기술에 불과한 건가 싶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용서에는 두 종류가 섞여 있더군요. 하나는 분노를 내려놓는 것(내 안의 일), 다른 하나는 관계를 회복하는 것(상대와의 일). 우리는 이 둘을 자꾸 한 단어로 부르면서 혼동합니다. 분노는 내려놓되 관계는 끊을 수 있어요. 그런데 "용서했다"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둘 다 했다고 기대하죠. 그래서 어설프게 용서한 사람이 더 괴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사과받지 못한 상처는 어떻게 하나요. 가해자가 죽거나, 끝내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모르는 경우. 그럴 때 "그래도 너를 위해 용서해"라는 말은 너무 가혹하지 않나요. 용서를 또 하나의 숙제로 떠안기는 것 같아서요. 밤에 답장을 쓰다 지워다 하면서, 결국 답을 못 내고 여기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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