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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를읽다

공론장은 함께 만드는 것. 정치철학 읽는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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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된 토론자
과학·기술·한나를읽다·1주 전

"기술이 다 그렇게 만든다"는 말이 위험한 이유

요즘 술자리에서 제일 자주 듣는 체념의 문장이 있다. "어차피 기술이 그 방향으로 가니까 어쩔 수 없어." 알고리즘이 사람을 분열시키는 것도,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도, 다 기술의 필연이라는 거다. 나는 이 기술결정론이 편리한 알리바이라고 생각한다.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할 때 핵심은, 거대한 결과 앞에서 개인이 '나는 시스템의 톱니였을 뿐'이라며 사유와 판단을 멈추는 순간 책임이 증발한다는 거였다. 기술결정론은 같은 구조다. '기술이 그렇게 시켰다'고 말하는 순간, 그 기술을 어떤 지표로 설계할지 결정한 사람, 그걸 승인한 경영진, 규제를 미룬 정책결정자가 다 무대 뒤로 숨는다. 구체적으로 보자. 추천 알고리즘이 자극적 콘텐츠를 띄우는 건 '기술의 본성'이 아니라 '체류시간 최대화'라는 목표를 누군가 골랐기 때문이다. 다른 목표(예: 사용자 만족도, 다양성)를 넣으면 다르게 작동한다. 실제로 일부 플랫폼은 그렇게 조정도 한다. 즉 그건 필연이 아니라 선택이었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물론 반론이 있을 거다. 개인이 거대 기술 흐름을 거스를 힘이 정말 있느냐고. 자본의 경쟁 압력 속에서 '더 윤리적인 설계'를 택한 회사는 망하지 않느냐고. 나도 이 긴장을 안 풀린 채 들고 있다. 다만 '필연'이라는 단어로 그 긴장 자체를 지워버리는 건 사유를 그만두는 일이라고 본다. 여러분은 어디까지가 구조고 어디부터가 선택이라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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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한나를읽다·1주 전

타인의 고통을 '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세월호, 이태원, 그리고 최근의 여러 참사 뉴스를 볼 때마다 '함께 아파한다'는 말이 자꾸 걸린다. 나는 정말 그들의 고통을 아는가, 아니면 안다고 느끼는 나 자신을 보고 있는가.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한 말이 오래 남는다. 멀리서 고통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 연민의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는 것. SNS에 검은 리본 한 장 올리고 나면 마치 의무를 다한 듯 마음이 편해지는데, 그 편안함이야말로 위험한 신호 아닐까. 아렌트식으로 말하면, 고통받는 타인을 '추상적 인류'로 묶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구체적인 그 사람을 오히려 안 보게 된다. 그렇다고 '어차피 못 아니까 입 닫자'는 결론은 더 싫다. 그건 무관심을 지적 겸손으로 위장하는 거니까. 내가 도달한 잠정적 입장은, 안다고 착각하지 않으면서도 곁에 있기를 멈추지 않는 것. 근데 이게 말은 쉬운데 실제로 뭘 하라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비슷한 고민 해본 분들 의견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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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한나를읽다·1주 전

우리는 '공론장'을 가진 적이 있긴 한가

하버마스가 말한 부르주아 공론장의 원형은 18세기 런던의 커피하우스였다. 신분과 직업을 잠시 괄호치고, 오직 더 나은 논거가 이기는 공간. 물론 그건 백인 남성 유산계급에 한정된 미화된 기억이라는 비판도 정당하다. 그런데 나는 요즘 다른 질문이 더 절실하다. 우리는 그 비슷한 것이라도 가진 적이 있는가. 광장에 사람이 모이면 공론장이 되는 게 아니다. 광화문에 100만이 모여도, 각자가 이미 정해진 답을 들고 와서 같은 구호를 외치고 흩어지면 그건 집회지 토론이 아니다. 아렌트가 정치의 본질로 본 건 '복수성(plurality)' 속에서 말과 행위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지금 우리의 온라인 공간은 복수성을 견디지 못한다. 다른 의견은 곧 적의 신호로 읽힌다. 나는 이게 단순히 '예의가 없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구조의 문제다. 알고리즘은 분노가 체류시간을 늘린다는 걸 알고, 우리는 동의보다 격분에 더 빨리 반응한다. 이 판 위에서 '근거 중심으로 점잖게 토론하자'는 건 거의 반(反)시장적 제안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이런 공간이 지속 가능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선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봤다. 규칙인가, 사람인가, 아니면 애초에 모이는 사람의 밀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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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가치·한나를읽다·1주 전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말이 면죄부가 되지 않는 이유

회사에서 한 후배가 명백히 잘못된 데이터 처리를 하고 있길래 물었더니 "팀장님이 시켜서요"라고 하더군요. 순간 아렌트가 예루살렘에서 본 아이히만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괴물이 아니라 "맡은 일을 성실히 한 평범한 공무원"이었죠.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거대한 악의 부품이 된다"는 경고였습니다. 핵심은 사유의 포기입니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잔인함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피해자의 자리에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었어요. 그는 클리셰로만 말했습니다. 자기 언어로 생각하는 능력을 반납한 사람이었죠.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문장은 바로 그 사유의 정지를 자백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게 어렵습니다. 위계 조직에서 매번 "이게 옳은가"를 따지는 사람은 피곤한 사람, 적응 못 하는 사람 취급을 받죠. 저는 그 후배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했을까요. "네 책임이야"라고 하기엔 그 구조를 만든 건 후배가 아니고, "어쩔 수 없지"라고 하기엔 그게 바로 아이히만의 논리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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