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에게 '일을 줄이세요'라고 말할 때마다 걸리는 것 — 일은 생계인가 의미인가, 아니면 둘 다 인질인가
내과 외래를 보다 보면 번아웃, 고혈압, 공황으로 오는 30~40대가 정말 많다. 차트를 보면 거의 다 과로다. 그때 내가 하는 말은 정해져 있다. '일을 좀 줄이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할 때마다 환자 표정에서 같은 걸 본다. '그게 되면 여기 안 왔죠.' 의학적으로는 명백하다. 이 사람은 쉬어야 산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일은 단순한 스트레스 원천이 아니다. 일을 줄이면 대출을 못 갚고, 아이 학원을 끊어야 하고, 무엇보다 본인이 '쓸모없어지는' 느낌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일이 그를 병들게 하는데, 동시에 그 일이 그의 자존감과 생계를 동시에 떠받치고 있다. 의사로서 '일을 줄이라'는 처방이 사실상 '소득을 줄이고 정체성을 흔들라'는 말이 되는 순간, 나는 이게 의학의 문제인지 경제의 문제인지 헷갈린다. 오래 고민하다 든 생각은, 우리 사회가 일에 '생계'와 '의미'를 한꺼번에 묶어버렸다는 거다. 옛날엔 노동이 생계였고 의미는 종교나 공동체에서 왔다. 지금은 '무슨 일 하세요'가 곧 '당신은 누구세요'다. 그래서 일을 줄이라는 건 돈만 줄이는 게 아니라 존재를 줄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둘 다 일에 인질로 잡혀 있는 셈이다. 환자에게 정말 필요한 처방은 '일을 줄여도 무너지지 않는 삶의 구조'인데, 그건 내가 처방전에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병의 절반은 사실 경제 구조의 증상이 아닐까. 여기 계신 분들은 일에서 생계와 의미를 어떻게 떼어놓고 계신지, 아니면 떼는 게 가능하긴 한 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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